한국은 홍수의 나라다. 1년동안 내리는 강수량의 3분의 2가 6월부터 9월까지 여름철 넉달동안에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때문이다.

물난리를 막아주는 것은 숲이다. 숲이 울창하면 비가 내리면서 증발하는 양이 많아진다. 또 빗물을 스폰지처럼 쌓여있는 낙엽이 흡수하고, 많은 부분은 땅속으로 스며들어 간다. 그래서 숲은 강수량의 35%를 저장하는 거대한 물탱크다. 그러니까 숲을 깎아 만드는 골프장은 이런 기후조건에서는 물난리를 부르는 재앙의 원천이다.

그런데도 80년대말 노태우정권은 전국의 산을 깎아 골프장 공화국을 만들었다. 임기 5년동안에 자그마치 1백39개의 골프장을 허가해줬다. 20세기 최악의 자연파괴를 저질렀던 것이다.

골프는 원래 앵글로색슨의 레포츠로 등장했고, 지금도 그렇다. 영국과 미국이 그 본바닥이다. 유럽대륙에도 골프장들이 있지만 대중적인 레포츠는 못된다.

앵글로색슨이 아니면서 골프가 대중화된 나라가 일본이다. 태평양전쟁으로 패망한 뒤, 미국에서 수입해온 것이다.

일본은 1867년 미국포함의 강박으로 개항(開港)했고, 특히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뒤 미국의 영향권에 속해온 나라다. 일본이 미국처럼 골프의 나라가 됐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한국은 골프를 그 일본에서 수입해 왔다. 70년대까지 이 나라를 주물렀던 일본의 상업차관에 묻어서 들어온 것이었다.

그러나 노태우정권말기 골프장 홍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목청을 돋구면서 김영삼정부는 ‘공직자 골프금지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한국에서는 골프라는 레포츠가 제한된 일부 계층의 ‘신분’을 상징하는 장식물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박세리라는 갓 스물의 세계 골프여왕의 탄생은 놀랄만한 일이다. 그래선지 지난 5월 18일 박세리가 미국의 여자프로골프 챔피언쉽에서 우승하자 신문·방송들은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처럼 춤을 추었다.

중앙 일간지들은 너나없이 4개 또는 5개면에 걸쳐 골프판을 엮었다. 어김없이 1면에는 대문짝만한 박세리선수의 컬러사진을 올려놨다. 19일자 조간의 1면 머릿기사는 사실상 ‘박세리선수 우승’이었다. 신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김없이 체육면은 박세리가 전면을 차지했고, 사회면은 절반이상, 경제면도 박세리후원 기업인 ‘삼성’을 화제로 삼아 사실상 전면을 압도할만큼 화려한 머릿기사나 내리다지로 처리했다.

그중에서도 삼성계 신문인 중앙일보는 7개면에 걸쳐서 박세리를 엮었다.

3개 텔레비전도 저녁뉴스에서 머릿기사로 넷에서 여덟꼭지에 걸쳐서 박세리로 도배질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경제가 거덜이 나서 이 나라의 기업과 부동산이 송두리째 국제시장의 ‘할인판매대’위에 올라앉은 판에 여자프로골프선수권이 그처럼 중대한 일일까?

그래도 언론매체들이 국가적인 위기의 수습을 위해 제 몫을 제대로 해내고 있다면, 한 번의 호들갑쯤은 모른척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은 위기수습을 위한 토론의 광장을 제공하지 못했다. 따라서 능동적으로 위기수습과 복원을 위한 정책대안을 이끌어내고, 국민적합의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신문·방송들은 다만 국제금융시장의 나팔수요, 재벌과 같은 이해집단의 주장이나 정부의 정책을 전달해줄 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언론은 바람 부는대로 표류하는 뗏목과 같다.

그러던 판에 박세리는 천박한 상업적 욕구를 촉발한 것같다.

물론 세계의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그래서 미국의 신문들은 올림픽의 마라톤 1위를 거머쥔 선수를 1면의 머리에 올린다. 하지만 4~5개면에 걸쳐 법썩을 떨지는 않는다.

더구나 우리는 내일을 확신할 수 없는 위기의 수렁에 빠져 있다. ‘고통분담’ 없이 사회적 평화를 지킬 수 없고, 재벌의 본질적 개혁없이 우리에게 장래는 없다. 고통분담이나 재벌개혁이나 결국 기득권층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는 요구다.

언론은 이 ‘위기’가 명령하는 고통분담과 개혁을 다그치고 감시할 의무가 있다.

골프는 우리의 자연조건이 허락하지도 않고, 또 세계가 공유하는 대표적 레포츠도 아니다. 다만 ‘박세리 우승’을 뉴스로 크게 다루고, 그의 주변을 전해주는 읽을 거리를 정리해 주는 기획으로 충분하다.
마치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날뛴 언론의 프로골프광풍은 이 나라 언론사에 낯뜨거운 넌센스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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