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띠 풀고 머리 맞대라(경향 28일자), 총파업…주가폭락…내일이 안보인다(문화 27일자), 경제 죽은 후엔 노사도 없다(동아 28일자), 가뜩이나 어려운데… 시민항의 빗발(서울 28일자), 파업만은 안된다(세계 27일자), 다시 벼랑에 설 수는 없다(조선 27일자), 한국파업 또다시 위기 부른다(한국 29일자).

신문의 어조가 사뭇 격앙돼 있다. 기사 제목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선동문이나 호소문의 한 귀절에 가깝다. 민주노총의 시한부 총파업에 대한 각 신문의 태도는 그만큼 단호했다.

총파업을 위험한 도박(동아), 공멸의 선택(중앙)으로 규정하며 민주노총에는 즉각 철회를 정부에는 단호 대처를 요구했다.

신문의 이런 십자포화에는 경제위기라는 포탄이 장전돼 있었다. 나라 경제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는 상태에서 총파업이 벌어지면 국가신인도를 떨어뜨려 외자유치를 가로막고 결국 공멸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무슨 수학공식처럼 세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식상한 논리라는 점을 염려했는지 신문은 11년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주가와 엔화 폭락을 덧붙여 그 강도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또 한가지를 덧붙였다. 제2기 노사정위원회가 그것이다. 사회구성원과 이해집단들의 협력과 공동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고 절박한 시점(조선 28일자 사설)인데다가 불만과 갈등은 대화로도 풀 수 있다(한국 27일자 사설)는 점을 들어 제2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해 문제를 풀라고 요구했다.

모든 것은 2기 노사정위에서 허심탄회하게 토의,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다. 대화의 장은 얼마든지
열려있지 않은가(문화 26일자 사설)라고 요구한 것이다.

각 신문의 이같은 주장은 그 어조의 간곡함에도 불구하고 호소력이 별반 느껴지지 않는다.
신문이 진정으로 대화를 통한 해결을 염원했다면 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성숙시키는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야 했다. 대화의 중개자이자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했다.

실업자들의 초기업 노조 가입허용 등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서 가까스로 합의한 내용이 국회 입법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뒤엎어지고, 재벌과 정치권의 개혁은 미루어진 채 노동자들의 희생만 강요하고 있는 현상을 짚어줄 필요가 있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공정한 눈길로 바라봤다면 중앙일보처럼 이번 총파업을 협상을 위한 노조활동이 아니라 고지 확보를 위한 힘겨루기 투쟁이라고, 또 권위주의 시대의 투쟁방식(27일자 사설)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공정한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총파업이란 수단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민주노총의 고뇌를 살펴 알리는 일부터 시작했었을 것이다.

신문은 지난달 25일 민주노총이 이번 총파업을 결정하게 된 배경과 요구조건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는데도 이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기자회견 내용을 단독 꼭지로 배치하지도 않았고 그 흔한 인터뷰조차 싣지 않았다. 신문은 기자회견 내용을 총파업 결정을 비난하는 익명의 여론 또는 정부의 사법처리 방침과 한 데 묶어 처리해버렸고, 민주노총의 요구조건은 비현실적이고 자가당착적인 망상으로 치부해 버렸다.

대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 주체를 두들겨 패고, 토론을 하기도 전에 그 결론을 강요하는 것, 이것이 대화신봉자 신문의 참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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