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지난해 10월 경기 고양에서 발생한 저유소 화재를 수사하면서 이주노동자인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언론에 이름과 국적 등 신원을 공개해 인권침해했다는 국가인권위원회 결정문이 나왔다.

인권위가 20일 낸 결정문을 보면, 경찰은 화재 이튿날 이주노동자 A씨를 긴급체포한 뒤 한 달여 간 4차례에 걸쳐 피의자 신문했다. 경찰은 신문 과정에서 ‘거짓말 아니냐’ ‘거짓말 말라’ ‘거짓말이다’ 등 발언을 반복했다. 이런 발언은 4차례 신문 조서상으론 62회, 마지막 신문의 영상녹화기록에선 123회 등장했다.

인권위는 “경찰관의 ‘거짓말 발언’은 피해자(A씨)가 자신에 유리한 사실을 진술할 때 나오거나 진술 자체를 부정하며 등장하는데, 사실상 피의자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행위다. 현행 형사사법체계가 인정하는 정상적인 신문과정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 17일 KBS 보도 갈무리
▲ 17일 KBS 보도 갈무리

경찰은 또 긴급체포 당일 이주노동자의 이름 일부와 국적, 나이, 성별과 비자 종류 등을 밝힌 문자메시지를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보냈다. 다수 언론사가 이 시점 앞뒤로 A씨의 신원 정보를 밝혀 보도했다.

인권위는 “피의사실을 공표할 필요성을 감안해도 이름‧국적‧나이‧성별‧비자 종류까지 상세 공개할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국민 관심사는 국가 주요기반 시설에서 발생한 화재의 원인이지, 공적 인물이 아닌 이주노동자의 신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또 “무분별한 공표가 오히려 피해자 개인은 물론 사건과 무관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편견을 악화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실화 가능성에만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켜 안전관리 부실과 같은 근본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인권위는 고양경찰서장과 경기북부지방경찰청장에게 담당 경찰관을 주의 조치하고, 소속 직원들에게 재발방지 직무교육을 실시하라고 권고했다.

지난해 10월7일 오전 대한송유관공사 경인지사에서 화재 폭발사고가 났다. 공사 측은 모니터링 인력이 없어 불이 붙은 뒤 20분가량 이를 몰랐고, 탱크시설엔 화재 감지장치나 안전장치도 없었단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은 풍등을 날린 A씨를 조사하며 사고가 날 것을 알았다고 보고 중실화 혐의로 2차례 구속영장 신청했으나 모두 반려됐다. 지난 17일 KBS가 공개한 경찰 신문영상에는 경찰이 A씨를 향해 반말로 고성을 지르며 추궁하는 장면이 담겼다. A씨는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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