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 다큐멘터리를 중단한 책임자로 꼽히며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박치형 신임 EBS 부사장이 지난 24일 오전 기자와 만나 “어떻게 민주주의, 정의,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집단(노조)이 무조건적 사퇴만을 요구하느냐”며 당시의 진상규명을 위한 노사 동수 조사위원회 구성을 촉구했다.

이종풍 전국언론노조 EBS지부장은 지난 22일 “반민특위 다큐 제작 중단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작 책임자였던 박치형 부사장은 방송 공정성과 제작 자율성을 저버린 장본인”이라고 비판했다. 언론노조 EBS지부와 언론단체들은 박 부사장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5일 임명된 박 부사장은 2013년 반민특위 다큐 ‘다큐프라임-나는 독립유공자의 후손입니다’ 제작을 하던 담당 연출자 김진혁 전 EBS PD(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를 수학교육팀으로 인사 이동시키는 등 제작 중단 사태 책임자로 내부에서 평가되는 인물. 그는 당시 제작을 총괄하던 평생교육본부장(현 방송제작본부장)이었다. 제작 중단 사태 이후 김 전 PD는 그해 6월 사표를 제출하고 EBS를 떠났다.

지난 24일 오전 서울 당산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박치형 부사장은 “EBS에서 30여년 일하면서 여러 역할을 해왔다. 비록 능력이 부족할 순 있어도 EBS 가치와 역할, 비전에 관해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이라며 “그런데 지금은 방송 공정성을 훼손하고 침해한 인물로 낙인이 찍힌 상태다. 제작 자율성을 침해한 인물로 보도되고 관련 성명이 나오는 상황이 참으로 암담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고 사퇴를 요구하는 노조와 언론단체 성명, 보도 등이 ‘인격 살인’, ‘인민재판’이라며 울먹이기도 했다.

▲ 박치형 EBS 신임 부사장(왼쪽)과 김진혁 전 EBS PD. 사진=EBS·미디어오늘
▲ 박치형 EBS 신임 부사장(왼쪽)과 김진혁 전 EBS PD. 사진=EBS·미디어오늘
그는 2012년 12월 EBS 평생교육본부장에 임명됐다. EBS는 왜 반민특위 다큐를 제작 중이던 김진혁 전 PD를 수학교육팀에 발령했을까. 박 부사장 주장에 따르면, EBS 경영진은 수학 교육과 관련한 정부 지원 예산 50억원을 받는 데 주력했고 이를 위해 김 전 PD를 포함해 역량 있는 EBS PD들을 수학교육팀에 발령키로 했다는 것.

당시 담당 부장 등을 통해 ‘김 전 PD가 2013년 5월 방영될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박 부사장은 경영진에게 제작 상황을 전달했고, 신용섭 전 사장 등 핵심 경영진은 “계속 제작하게 해주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전 PD가 수학교육팀 발령을 받은 뒤 2주 만에 파견 형식으로 교육다큐부로 배치된 까닭이었다.

하지만 EBS는 그해 4월 인사에서 교육다큐부로 파견된 김 전 PD를 다시 수학교육팀으로 발령했다. 이후 EBS 다큐멘터리 제작 부서에 대한 ‘표적 감사’ 논란이 불거지는 등 EBS 노사 관계는 격랑에 빠졌다. 언론계에서는 이명박 정부에서 임명된 신용섭 사장이 새 정부(박근혜정부) 눈도장을 받기 위해 역사 다큐를 무력화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박 부사장은 제작 중단 사태 과정에서 소극적으로나마 경영진에게 ‘제작은 해야 한다’는 견해를 전달했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박 부사장에 따르면, EBS 경영진들은 방송 예정일이 계속 연기되는 것과 김 PD의 외부 활동 등을 문제 삼아 파견을 철회했다. 박 부사장은 “(제작 중단 사태에) 반발하는 구성원들에게 ‘여러분의 역사 인식과 저의 역사 인식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 적 있는데, 그 이야기가 경영진에게 들어갔던 것 같다. 많은 질책을 받았다. 그 후 본부장 임명 1년 만에 면보직 됐다”고 주장했다.

박 부사장은 “논란의 국면에서 경영진에 먼저 사표를 던지진 못했지만 제작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면 내가 본부장직을 계속할 수 없다는 입장은 분명히 전했고, 내 입장이 받아들여져 파견 형식으로나마 김 전 PD가 계속 제작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제작 중단 사태에 사표로 책임지진 못했지만 소극적으로나마 EBS 경영진에 항의했다는 취지다.

하지만 본부장이었던 그가 제작 중단 사태와 김 PD 인사 논란에서 면책 대상인지는 의문이다. 김 전 PD는 25일 통화에서 “2013년 1월 수학교육팀 발령 때는 다른 PD가 나 대신 연출을 맡는 식으로라도 제작을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제작이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제작의 연속성을 위한 조치 없이 인사를 낸 것에 비춰보면 제작을 멈추려는 의도가 컸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 전 PD는 “수학교육팀 발령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다큐부로 파견됐는데, 3~4주 정도 제작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이후 사측이 각종 서류, 자료 조사, 제작진 프로필 등을 전방위적으로 요구했고 한 달여 뒤 파견이 취소되고 수학교육팀에 다시 배치됐다. 이런 사측의 무리한 요구가 박 부사장이 주도한 문제는 아니라고 안다. 하지만 인사에 책임이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전 PD는 “수학교육팀 발령 소식을 내게 처음 통보한 분이 박 부사장이었고, EBS 인사도 본부장들과 부서장 등이 모여 종합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라면서도 “박 부사장이 개인적으로 내게 사과했고, 더 큰 책임은 신용섭 전 사장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박 부사장이 현재 EBS에서 책임을 지실 수 있는 위치에 계신 분이니 공개 사과를 하고 반민특위 다큐를 재개해 구성원의 판단을 받으면 좋겠다는 뜻을 거듭 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PD는 지난 16일 청와대 청원을 통해 EBS 부사장 임명 철회와 EBS의 반민특위 다큐멘터리 제작 재개를 요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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