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태프에게 ‘렉카(자동차 탑승씬 촬영용 특수차량)’ 촬영은 아찔하다. 보호장구 없이 렉카에 올라타 도로 위를 달린다. 한둘이 아니라 촬영·조명 스태프 대부분이 올라탄다. 장비·사람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 없을 때도 많다. 한 조명스태프는 자동차가 발 위를 구른 적이 있다. 배우가 실수로 사이드브레이크를 잠그지 않았고, 발 놓을 데 없던 스태프가 바퀴 뒤 공간에 발을 쑤셔 넣고 있다가 오르막길에서 다쳤다.

배우·감독도 마찬가지다. 도로 위 차량에 무방비 노출돼있다. 수면부족은 위험을 더한다. 사전제작 아닌 드라마 제작진은 하루 16~20시간 촬영이 허다하다. 한 방송스태프는 “겨울이나 날 좋을 때 정말 힘들다. 겨울엔 바퀴 주변으로 나오는 본네트 열 때문에 잠이 쏟아지는데 졸다가 넘어지면 사고”라고 했다.

KBS는 최근 두 마리 토끼를 잡기로 결단했다. ‘특수촬영 스튜디오’ 구축이다. 자동차씬을 내부에서 찍는 스튜디오다. 내부 촬영 장점은 다양하다. 노동시간은 줄고 촬영비용은 절감되며 작업환경은 안전해진다. 초기 구축 비용만 감내하면 된다. 편성본부 영상제작국이 지난해 여름부터 준비해 예산을 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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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일 오후 KBS 별관 ‘B스튜디오’에서 특수촬영 시스템 시연회가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위), KBS 영상제작국(아래)
▲ 12일 오후 KBS 별관 ‘B스튜디오’에서 특수촬영 시스템 시연회가 열렸다. 사진=손가영 기자(위), KBS 영상제작국(아래)

12일 오후 KBS 별관 ‘B스튜디오’에서 특수촬영 시스템 시연회가 열렸다. KBS 임원들과 제작진에게 공개하는 마지막 시범 기회다. 이훈희 제작2본부장, 박상재 KBS아트비전 사장, 문보현 드라마센터장, 드라마센터 책임피디과 제작진 100여명이 모였다.

준비된 검은 세단 뒤 대형 스크린이 설치됐다. 스크린엔 미리 찍어 놓은 거리 영상이 계속 나왔다. 촬영감독은 스크린을 배경 삼아 운전자를 촬영했다. 차량 앞·뒤, 천장엔 조명장비가 달렸다. 차량 이동에 따른 빛 움직임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스튜디오 설립은 주52시간제를 고민한 결과다. 방송업은 그동안 근로기준법 노동시간 조항 적용이 제외된 특례업종이었지만 지난해 특례에서 빠졌다. 어떻게든 노동시간을 줄일 방안이 필요했고 그 결과 촬영시간과 비용 모두 낮출 방법이 특수촬영 시스템 구축이었다.

추재만 영상제작국장은 “연간 1억원 이상 절감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방영된 2TV 일일연속극 ‘끝까지 사랑’ 렉카씬 촬영엔 최소 2000만원이 들었다. 이밖에 주말극, 미니시리즈, 단막극 등을 합하면 비용은 최소 1억원이 추산됐다.

밤낮, 날씨 등 외부 환경에 촬영을 맞출 필요가 없어 촬영시간도 획기적으로 준다. 도로 사정에 맞출지 않아도 돼 촬영 대기시간도 준다.

▲ 특수촬영 시스템 구상도. 사진=KBS 영상제작국
▲ 특수촬영 시스템 구상도. 사진=KBS 영상제작국
▲ KBS 드라마 제작진이 렉카 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KBS 영상제작국
▲ KBS 드라마 제작진이 렉카 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KBS 영상제작국
▲ 12일 오후 KBS 별관 ‘B스튜디오’에서 특수촬영 시스템 시연회가 열렸다. 사진=KBS 영상제작국
▲ 12일 오후 KBS 별관 ‘B스튜디오’에서 특수촬영 시스템 시연회가 열렸다. 사진=KBS 영상제작국

스태프로선 다양한 영상 연출도 가능하다. 렉카씬은 촬영 기법이 매우 제한적인데 스튜디오에선 다양한 카메라 기법 시도가 가능하다. 미리 ‘배경 소스 영상’만 찍어놓으면 겨울에 ‘벚꽃 날리는 봄 거리’ 연출도, 간단한 해외 거리 연출도 가능하다.

‘시대극’에도 적극 활용할 수 있다. 지금은 1980년대 거리를 표현하기 위해 드라마에 맞는 한적한 시골을 찾아 직접 내려가 촬영한다. 미래를 대비할 수도 있다. 추 국장은 “지금 거리를 소스로 남겨두면 30년 후 KBS 후배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KBS는 장기적 수익성도 주목한다. 지난해 중국의 한 드라마 제작사가 렉카씬을 찍으러 한국에 왔다. 중국 베이징은 도로 혼잡 방지 등의 이유로 렉카 촬영이 금지다. 다른 제작사들이 KBS 배경 영상을 콘텐츠로 활용할 가능성도 있다. 특수촬영 시스템으로 다양한 수익사업을 벌일 수도 있다.

사업을 주도한 유재광 팀장은 “배우들도 기대한다”고 전했다. 렉카에 오른 배우들은 한여름에 특히 어렵다. 오디오 녹음 때문에 에어컨을 켤 수 없다. 위험한 도로 환경에 더해 미세먼지 같은 환경 문제도 있다. 얼마 전 옆 스튜디오에서 촬영 중이던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 배우들이 1차 테스트 현장을 찾았다. 유 팀장은 “최수종씨도 매우 기뻐하며 ‘얼른 도입하자’고 제작진에게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전했다.

한 방송스태프는 “KBS의 시도가 목숨을 걸고 찍는 렉카 촬영 근절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은 렉카 탑승 인원을 명확히 정하고 안전장치를 착용해야 촬영할 수 있다. 한 촬영감독은 “20년 전 영국 로케이션 촬영을 갔는데 ‘하네스(낙하산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으면 촬영허가를 내지 않더라. 도저히 불편해서 뺐더니 경찰에게 걸려 굉장한 벌금을 냈다”고 말했다.

한국 렉카 촬영 현장엔 안전 장비나 대책이 없다. 경찰서에 신고 안하는 때도 많다. 일반도로나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촬영할 땐 경찰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드라마 촬영 초반부나 사전제작 드라마 경우 가능하지만 그밖엔 거의 지키지 못한다.

전용 스튜디오는 이르면 올해 상반기 구축된다. KBS 영상제작국은 이날 시범 설치한 시스템을 기반으로 설비 구매 등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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