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민주노총 등, 서초동 삼성전자 앞, 이OO 재구속 및 경영권 박탈 촉구 투쟁 선포 기자회견”

한 언론사가 지난 20일 ‘오늘의 주요일정’으로 집회시위 정보를 보도한 내용이다. ‘이OO’이라는 이름은 집회 시위 주최 단체와 시위 장소를 따져보면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이름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공인이고 그의 재구속 여론은 이미 알려진 사실인데 왜 그의 이름을 가렸을까. 이재용 부회장의 이름을 가린다고 해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데도 굳이 이름을 익명처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은 집회시위 정보를 팩스를 통해 주요 언론사에 배포한다. 언론사는 ‘오늘의 주요일정’이라는 제목으로 집회시위 내용을 알린다. 이재용 부회장 이름의 익명 처리도 이 같은 과정을 거쳤다. 경찰이 이름을 가리고 보내고 언론이 이를 따라 처리하면서 누구나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이름은 없는 이상한 집회 시위가 되는 셈이다.

경찰은 공인 여부를 떠나 개인의 이름이 들어간 집회 시위 신고가 접수되면 익명 처리를 원칙으로 언론에 전달했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언론이 보도하는 주요일정에는 이재용 부회장 뿐만 아니라 전직 대통령의 이름도 익명 처리됐다. 지난 2016년 11월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여론이 거셀 때 한 시민단체의 집회 시위는 ‘박OO 퇴진, 전경련 해체 촉구’라는 이름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또 다른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는 ‘박OO-최순실 게이트 시국선언’이 됐다. 지난해 12월 한 보수단체의 문재인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 역시 ‘자유한국당사, 김정은 방남 저지 및 문OO 퇴진 촉구 집회’로 알려졌다.

특정인물에 대한 집회 시위 내용을 알릴 때 주의를 요구하는 건 맞다. 실제 한 보수단체는 자신들의 모함했다면서 공인으로 볼 수 없는 한 개인의 자택 앞에서 집회 시위를 한다고 신고했다. 이름을 공개했을 때 피해를 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공인의 경우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비판 대상으로서 여지가 있다면 국민알권리 차원에서 공개하는 게 맞다. 집회 시위 주최 입장에서도 특정 인물을 규탄하는 내용인데 외부에 알려질 때 이름을 가리는 조치에 부당함을 느낄 수 있다.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촉구 집회가 한창 일 때 경찰이 익명 처리를 하면서 한때 현직 대통령 보호 차원에서 경찰이 봐주기를 하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지만 경찰은 달리 해명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정보과는 25일 통화에서 “집회 시위내용은 정보과에서 취합해 집회시위 관리자에게 알리고 언론에 배포된다”면서 “공인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정보보호법과 정보공개법에 근거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름을 가리고 준다”고 밝혔다.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도 공인인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어찌됐든 법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사람 이름과 생년월일, 전화번호 등은 무조건 가리고 배포하고 있다. 간혹 이름을 가린 사람의 이름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도 같은 답변을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희가 공인이라고 하는 특정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조치가 아니라 법률근거에 의해서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민주노총 조합원과 삼성 해고노동자 등이 3월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 앞에서 ‘국정농단 주범 이재용 재구속 촉구, 경영권 박탈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마치고 주주총회 참석을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 민주노총 조합원과 삼성 해고노동자 등이 3월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 앞에서 ‘국정농단 주범 이재용 재구속 촉구, 경영권 박탈 투쟁선포 기자회견’을 마치고 주주총회 참석을 요구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경찰은 법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공인의 이름도 가릴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기계적인 법 적용으로 국민 알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만하다.

경찰이 이름을 가린 집회시위 정보를 제공하면서 특별히 이의를 달지 않고 보도하는 언론도 있지만 내부에선 공인 여부를 가려 이름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 언론이 경찰이 익명 처리한 이름을 공인이라고 판단해 공개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지난해 같은 취지로 열린 이재용 부회장 재구속 촉구 촛불문화제는 언론이 이름을 공개해 주요일정으로 보도했다. 한 언론사 기자는 “이재용 같은 인물은 공인라는 점에서 세글자를 제대로 써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반면, 통상 법원이 재판 일정에 공인의 이름을 적시하고 언론에 배포한다. 서울고등법원이나 중앙법원, 행정법원 등에서 ‘적시처리’ 필요 주요사건으로 분류한 뒤 재판을 받는 사람과 주요 혐의 내용, 공판기일 일정을 알려주는 형식이다.

혐의가 특정돼 재판을 받고 있는 공인의 재판은 국민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법원에서도 이를 감안해 취한 조치다. 다만, 법원이 구속영장실질심사 일정과 결과를 언론에 알릴 때는 공인 여부에 따라 이름 공개가 엄격하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23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을 때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의 이름 석자를 공개했다. 하지만 지난 3월 21일 가수 정준영이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구속됐을 때 법원은 이름을 ‘정O영(가수)’으로 가리고 구속영장 발부 결과를 언론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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