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가족부가 개정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이하 성평등 안내서)가 ‘아이돌 외모 지침·검열’이라는 비판 속에 일부 수정·삭제될 전망이다. 성평등·성역할 고정관념을 지양하자는 취지의 권고에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의 언론검열이 소환됐고, 문재인 정부가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한다는 주장이 여과 없이 확산됐다. 그 시작에는 언론이 있었다.

여성가족부 성평등 안내서는 2017년 4월 발간한 내용을 개정·보완한 것이다. 지난 12일 방송 유관 기관·협회에 배포됐고 여성가족부·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홈페이지에 게재됐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양성평등문화 확산을 위한 방송 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 개발’(2016년), ‘미디어 외모·성형 재현에 대한 가이드라인 연구’ 보고서와 대중매체 성평등 모니터링 사례가 바탕이다. 성평등 안내서는 주제 선정, 남성·여성 균형 있게 대표, 성폭력·가정폭력 정당화 지양, 성차별적 언어 사용 자제 등 원칙을 제시했다.

성평등 안내서 개정판은 공개된 지 나흘 만에 아이돌 외모도 간섭하는 ‘문화 규제’라는 주장에 뒤덮였다. 16일 “음악방송 가수들은 쌍둥이?…여가부 성평등 방송제작 지침”(파이낸셜뉴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처음이었다. 이 신문은 “사회주의도 아닌데 정부가 방송 제작의 세부적인 부분까지 개입하나”라는 누리꾼 지적이 있다며 “여가부가 방송 제작에 지나치게 개입하면서 시청권과 선택권을 규제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고 보도했다.

▲ 여성가족부가 지난 12일 배포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표지.
▲ 여성가족부가 지난 12일 배포한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 안내서' 표지.

▲ Mnet '프로듀스101'의 한 장면.
▲ Mnet '프로듀스101'의 한 장면.
문제가 된 부분은 부록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한 외모 재현을 위한 가이드라인’에 사용된 몇몇 문구다. 획일적 외모 기준을 제시하는 연출 및 표현을 지양해야 한다는 대목에 ‘비슷한 외모의 출연자가 과도한 비율로 출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음악방송 출연가수들은 모두 쌍둥이?”라는 제목의 사례를 든 것이다.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의 외모는 마른 몸매, 하얀 피부, 비슷한 헤어스타일, 몸매가 드러나는 복장과 비슷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 외모 획일성은 남녀 모두 같이 나타난다”는 설명이 붙었다.

그리고 정치권이 가세했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여가부 장관은 여자 전두환인가”, “군사독재 시대 때 두발 단속, 스커트 단속과 뭐가 다른가”라며 “방심위(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인터넷 검열, 여가부는 외모 검열! 적폐 청산이 모자라 민주주의까지 청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후 18일 자유한국당도 “정부가 이제는 국민 외모까지 간섭하고 통제하려 하는가”라며 “문재인 대통령과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런 ‘국민 통제 정책’이 4.5공화국 시절의 ‘장발·미니스커트 단속’과 무엇이 다른지 답변해야 한다”고 했다.

언론은 정치권 주장을 재생산했다. ‘주류’ 언론 중에서는 보수 성향 일간지를 중심으로 판이 깔렸다. 19일 중앙일보는 “비슷한 외모 아이돌 출연 줄여라…역풍 맞은 여가부”에서 “11일 정부의 해외 성인 도박 사이트 접속 차단 등으로 규제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진 상황에서 여가부가 일종의 ‘외모 가이드라인’까지 내놓은 게 자칫 논란의 불씨를 더욱 키울 수 있”다고 보도했다. “어처구니 없는 여가부의 ‘걸그룹 외모 규제’”라는 제목의 사설도 실렸다. 같은날 조선일보도 “여가부 ‘비슷한 외모의 아이돌, 방송 출연 줄여라’”라는 기사를 냈다. 여가부가 결국 불필요한 오해를 야기한 일부 표현·인용 사례는 수정 또는 삭제하겠다고 밝힌 뒤엔 “[기자의 시각] 여가부의 헛발질 릴레이”(조선일보), “[취재일기] ‘걸그룹 미모 할당제’ 역풍 맞은 여가부”(중앙일보) 등 여성가족부 출입 기자들의 취재후기도 이어졌다.

▲ 여성가족부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안내서'를 비판한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 주장을 전한 17일일자 보도들. 사진=네이버 검색 결과 갈무리
▲ 여성가족부 '성평등 방송 프로그램 제작안내서'를 비판한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 주장을 전한 17일일자 보도들. 사진=네이버 검색 결과 갈무리

규제 아닌 권고에 호들갑 떤 언론, 배경은 

성평등 안내서는 법적 규제가 아닌 권고다. 언론의 보도가 사회적 인식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올 때마다 수많은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고 개정됐다. 여가부만 해도 성평등 안내서 뿐 아니라 한국기자협회와 공동으로 성희롱·성폭력 보도수첩을,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보도준칙을, 보건복지부는 자살보도·아동학대사건 등 보도 권고기준을 내놨다. 언론·미디어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정도와 금도를 지키자는 취지다. 정부부처가 발간해왔다는 점에서 권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른바 ‘보도 참사’ 등이 벌어질 때마다 ‘언론이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만 반복된다.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는 “가이드라인을 ‘규제’라는 것도 프레이밍”이라고 지적했다. ‘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국민적 트라우마를 자극해 논란을 확산시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정부에서 이런 것을 발간하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중의 인식이 있다는 것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며 “보수 언론이 정부가 ‘젠더 갈등’을 일으킨다는 프레이밍을 쓰는 데 편승하려는 측면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물론 성평등 안내서에 대한 아쉬움도 지적된다. 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관료주의적 표현들이 사용됐다는 시각이다. 정영희 고려대 문화정보연구소 연구원은 “논란이 되는 문장만을 읽어보면 ‘하지 마라’, ‘해선 안 된다’는 표현이 눈에 띈다. 맥락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친절하지 않은 안내서라는 점에서 논란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양성을 확장하고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한 논의가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적으로 쟁점화돼 논란이 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강조했다. 김수아 교수 또한 “방송·미디어가 보여주는 인물의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양적연구로도 많이 나온 문제들”이라며 “맥락 정보를 사장한 채로 일부 내용을 발췌해서 사용해선 안 된다”고 전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일련의 언론 보도를 두고 “여성가족부의 표현 문제는 너무도 부차적이고 미묘한 표현의 문제”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차별적인 표현과 방송 관행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가부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코멘트 한 줄로 충분하다.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더라도 자율규제 등을 비롯해 사회를 바꿔나가기 위한 틀을 만들어보자는 장을 만들어야했다”고 지적했다.

▲ 지난 19일 JTBC '정치부회의'의 한 장면.
▲ 지난 19일 JTBC '정치부회의'의 한 장면.
실제 최근 며칠간 성평등 안내서를 다룬 언론 보도는 성평등 안내서를 둘러싼 논란에 집중됐다. 성평등 이슈에 전향적인 보도로 평가받아온 매체들조차 맥락이 삭제된 논란을 전했다. “미디어가 부추기는 외모지상주의와 성형 광풍, 성차별적 언행 등은 규제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국가가 아이돌 외모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2월19일, 한국일보 ‘지평선’)이라는 식의 표현은 성평등 안내서를 불필요한 규제·개입으로 보는 프레임에서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

JTBC는 특히 성평등 안내서를 희화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일 ‘정치부회의’는 뉴스나 토론 프로그램 출연자의 성별·연령별 균형성을 맞춰야 한다는 대목을 두고 “‘정치부회의’에도 걸리는 지침이 있다 (…) 보시다시피 저희는 국장까지 4명이 남성이고, 신 반장 혼자 여성이다”, “고 반장이 여장을 하는 것으로 하죠”라며 한 남성 기자가 긴 머리 가발을 쓴 채 등장했다. 

이를 두고 38개 언론·여성 단체들은 21일 공동 성명을 내고 “우리사회의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 분야의 변화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환으로 제작된 안내서를 군사독재시절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한 두발단속이나 스커트 단속과 비교하는 국회의원과 이를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들의 수준이 개탄스럽다”며 “성평등한 방송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그 의미를 훼손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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