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은 충분히 논의됐다.” 지난 1월 전직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의 성폭력 의혹으로 체육계 성폭력 문제가 화두에 오른 뒤 체육계 관계자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일부 피해자들의 용기를 언론이 앞 다퉈 보도하면 관계부처는 대책을 내놓는다. 보도 열기와 사회적 관심이 사그라지면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또 다른 피해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이번엔 다를까. 20대 국회에선 최근 10년 이래 가장 많은 체육계 성폭력 근절 법안이 발의됐다. 가해자에게는 불이익을, 피해자에겐 지원을 강화하고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포함한 체육계 병폐 해소 방안들이 담겼다. 문제는 이 법안들이 2월 국회 문턱에 쌓이고 있다는 점이다. 잠자는 체육계 성폭력 관련 법안들을 살펴봤다.

성범죄 가해자 처벌 강화, 영구제명 조치

체육계 성폭력 피해자들은 침묵하거나, 피해를 폭로한 뒤 체육계를 떠나야 했다. 앞서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체육계에 만연한 학습된 무기력증은 일단 내려진 징계가 번복되거나 가해자가 몇 개월 만에 멀쩡하게 복귀할 때 증폭된다”고 지적했다. 

대한체육회는 2008년 성폭력 등 가해자 영구제명 원칙을 밝혔지만, 실제 2014~2018년 신고 건수 113건 중 가해자 영구제명은 9.7%에 불과한 11건에 그쳤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지난달 국회 토론회에서 성폭력 신고자와 가해자 분리의 명시적 규정조차 없다고 털어놨다.

여야를 막론한 의원들 동의가 가장 많은 체육계 ‘미투’ 법안은 단연 성폭력 가해자 처벌과 분리조치 강화 법안이다. 지난 10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인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체육 지도자가 선수에게 신체적 폭행을 가하거나 상해를 입히면 지도자 자격을 정지하고, 형이 확정되면 지도자 자격을 영구 박탈하는 내용의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지도자가 폭력 예방 및 성폭행 방지 교육을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이 개정안 발의에는 19명의 여야 의원이 동참했다.

▲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재범 코치 성폭력 사건 의혹 관련 진상규명 및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재범 코치 성폭력 사건 의혹 관련 진상규명 및 스포츠계 성폭력 문제 재발 방지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 연합뉴스

체육계 성폭력 피해자 다수는 미성년자 시절부터 계속 폭력·성폭력 피해를 호소했다. 권미혁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29일 체육지도자 결격사유 및 자격취소 요건에 성폭력 범죄와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를 포함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성폭력 방지와 피해자 보호 의무를 부과해, 정부가 우선 비용을 부담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면 향후 관련 기관에 구상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방안도 담았다.

바른미래당 김수민 의원은 지난달 25일 학원 및 과외교습에 체육 관련 교습을 포함시켜 현행법상 규제를 받도록 하고, 성범죄 전력자는 강사가 될 수 없도록 하는 학원의 설립·운영 및 과외교습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같은 날 이동섭 바른미래당 의원은 체육지도자 인권교육을 매년 의무화하고 체육지도자 결격사유에 성폭력 범죄를 포함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장려금을 받는 체육지도자가 해당 선수에게 폭행, 성폭행, 협박 또는 부당한 행위 강요 등을 저지르면 지급 받은 금액의 전부 또는 일부를 환수하거나 장려금 지급을 중단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민주평화당 김광수 의원 등 13인)도 나와 계류중이다. 

2차 가해 방지, 피해자 지원 기구 설립

성폭력 피해자들이 체육계에서 정상 활동을 이어가도록 피해자 지원 체계를 강화하는 법안들도 발의됐다. 지난 2009년부터 운영 중인 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는 신고가 접수된 뒤 각 종목 단체에 진상 파악을 맡기거나,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신고자 정보가 노출될 우려 등으로 피해자 지원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피해자가 안심하고 피해를 신고하고, 향후 지원을 받을 ‘원스톱 지원체계’가 요구돼 온 이유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11일 공정한 스포츠 환경 조성과 체육인 인권보호를 목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인가를 받아 ‘스포츠윤리센터’를 설립하는 내용의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남인순 민주당 의원이 같은 날 대표 발의한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은 국가와 지자체가 체육계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선수와 체육지도자 보호를 위한 시책을 마련하도록 하고, 자격검정 기관 및 연수기관에서 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문체위 자유한국당 간사인 박인숙 의원은 지난달 진상조사 과정에서 피해자 정보 등을 누설하면 처벌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신고 접수와 진상조사 과정에서 직무상 피해자 정보를 알게 된 자가 비밀을 누설하거나 정보를 유포하는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이 골자다.

엘리트 체육 구조개선, 여성 지도자 할당제 논의

체육계 성폭력 등 스포츠 인권 문제 바탕에 성과 및 메달 지상주의가 있다는 사회적 공론도 형성되고 있다. 범행을 저지른 가해자들을 감싸고 피해자들이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권미혁 민주당 의원은 지난 1일 국민체육 목적은 국위선양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국가가 앞장서서 올바른 스포츠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국제경기대회에서 국가별 순위 공표 금지 조항을 신설하는 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안민석 민주당 의원의 경우 지난달 31일 ‘엘리트 체육 중심의 기존 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스포츠클럽을 정의하고 육성하기 위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 책무를 규정하는 스포츠클럽 육성법안을 제안했다.

여학생이 포함된 학교운동부에 여성지도자 또는 여성 전담교사를 배치하도록 하는 방안도 나왔다. 임재훈 바른미래당 의원이 지난달 25일 대표 발의한 학교체육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이 법안에는 학교운동부지도자 계약 해지 요건에 성폭력을 명시하고 성폭력 피해자 고통 경감을 위해 사건 조사 기간 동안 지도자 업무 정지, 신고체계를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유승희 민주당 의원은 12일 국회에서 체육계 성폭력 근절을 위한 입법공청회를 열어 체육지도자 여성할당제를 논의했다. 2018년 기준 등록된 체육지도자 가운데 여성은 17.9%에 불과하며, 대한체육회나 시·도체육회 여성 임원은 각각 13.7%, 11.4%에 그치는 등 여성 선수들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책이 반영되기 어렵다는 한계가 지적됐다. 여성지도자 할당제는 지난 2007년 농구계 성폭력 폭로를 계기로 공론화됐고, 문화체육관광부는 2008년 ‘스포츠 성폭력 근절 대책’ 일환으로 여성지도자 할당제를 밝힌 바 있다.

앞서 19대 국회에서도 적게나마 체육계 폭력·성폭력 근절을 위한 법안들이 발의됐지만, 6건 중 5건이 임기만료 폐기로 사라졌다. 2000년대 초반 여성민우회 대표로서 체육계 성폭력 근절 방안 논의에 앞장섰던 권미혁 민주당 의원은 체육계 성폭력 근절 방안을 법제화할 적기를 놓쳐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권 의원은 “문제가 터져나올 때마다 그때그때 대책이 나왔지만 근본적으로 성적을 잘 내는 사람들이 용서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가 이어져 왔다. 스포츠 정신과 구조 문제, 학원체육의 성적위주 문화 등 여러 가지 구조가 변화되지 않아 단기적인 대응만 논의됐었다”며 “과거에도 문제는 많이 지적됐지만 지금처럼 사회적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 지금은 체육계의 내부적 문제가 터져나오고, 피해자들의 ‘미투’ 운동도 겹치면서 전향적인 방안이 마련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고 전했다. 국회가 해야 할 일이 많다. 언론도 ‘개점 휴업’ 중인 국회 앞에 놓인 이 법안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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