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빚을 졌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 1주년을 맞은 이용관 이사장의 소회다. 아들의 사망이 사회를 울린 파장이 컸기에 센터가 이만큼 안착했다는 고마움이 첫째, 생전 학생단체 활동을 한 모습에 걱정만 하고 훌륭하다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둘째다. 그는 “센터를 통해 한빛이에게 빚을 갚는다”고 했다.

한빛센터는 불합리한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고민했던 고 이한빛 PD 유지를 계승했다. 설립일 ‘1월24일’도 이한빛 PD 생일과 같다. 한빛센터는 지난해 1월24일 설립돼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3일 한빛센터에서 이 이사장을 만나 한빛센터 지난 1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빛센터에게 지난 1년은 “휘리릭” 지나갔다. 현장의 뜨거운 반응에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보창구 ‘미디어신문고’를 열자마자 “이렇게 촬영하다 죽을 것만 같아요” 글이 올라왔다. “염전 노예가 된 기분입니다” “4시간 이상 재워주세요” “아침밥 주세요” 등 노동기본권 보장을 바라는 현장고발이 계속됐다.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 사진=손가영 기자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 사진=손가영 기자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내벽에 붙은 메모지. 사진=손가영 기자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내벽에 붙은 메모지. 사진=손가영 기자

지난 1년 한빛센터에 접수된 고발 현장만 드라마 개수로 28개다. MBC·KBS·SBS 등 지상파부터 tvN, MBN, OCN, 채널A, 옥수수까지 방송사 대부분이 걸렸다. “20시간 넘게 일하고 있다”는 장시간노동 고발이 가장 많았다. 네이버는 웹드라마 ‘품위있는 여군의 삽질 로맨스’ 임금체불로 논란이었고 TJB 대전방송 비정규직 아나운서들은 퇴직금을 받지 못해 한빛센터를 찾았다.

“1시간 쪽잠, 하루 20시간 노동, 쏟아지는 코피와 피로 누적, 염전 노예만도 못한 인권침해.”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의 한 스태프가 쓴 고발 내용이다. 한빛센터는 ‘인권 있는 드라마’를 위해 “드라마세이프(DramaSafe!)” 구호를 걸고 제작현장을 찾았다. SBS 드라마 ‘시크릿 마더’, MBN 드라마 ‘리치맨’, MBC ‘검법남녀’, tvN ‘나의 아저씨’ 등이다. 모두 하루 20시간 이상 촬영을 한단 제보가 나왔다.

이 과정에서 의미있는 성과도 나왔다. 일부 방송사들이 노동시간을 주 68시간으로 제한하고 하루 노동시간도 15시간으로 제한하거나 모든 스태프와 직접계약을 한단 제작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다.

노동자로 인정된 적 없는 방송스태프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았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9월 일부 팀장(감독)을 제외한 스태프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한빛센터, 언론노조, 청년유니온, 희망을만드는법 등 시민단체들이 고용노동부에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한 결과였다. 최초의 스태프노조도 탄생했다. 지난해 7월 조명·동시녹음·장비·미술 등 분야를 망라한 방송스태프들이 모여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결성을 알렸다.

이 이사장은 “아직 멀었다. 이제 시작”이라고 했다. 논란은 컸지만 실질적 변화는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센터엔 새 드라마가 시작할 때마다 제보가 접수되고 있다. 얼마 전에도 SBS의 한 드라마 스태프가 “이번 주에 120시간 넘게 일했다”고 호소했다. 1일 휴일을 빼면 하루 평균 20시간 넘게 일한 셈이다.

사진출처=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사건 대책위원회 페이스북.jpg
▲ 2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MBC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과 최승호 사장 면담 요구를 전하려다 가로막혀 40분 동안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사진=노지민 기자
▲ 2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MBC 드라마 제작환경 개선과 최승호 사장 면담 요구를 전하려다 가로막혀 40분 동안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사진=노지민 기자

결국 고소·고발까지 진행됐다. 한빛센터는 ‘1주 68시간 초과 노동 금지’를 약속한 CJ ENM, 스튜디오드래곤 등이 장기간 협의에도 약속을 지키지 않아 지난해 11월 최초로 고발 카드를 꺼냈다. SBS도 드라마 '황후의 품격' 스태프에게 하루 29시간30분 동안 일을 시켰다는 논란을 샀다. 한빛센터, 방송스태프지부 등은 SBS를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이 이사장은 “지난 3년을 보건대 근로기준법만 가지곤 방송노동자 노동기본권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다단계 하도급·턴키계약을 실질적으로 막거나 방송제작 환경에 특화된 근로감독 시스템을 만드려면 제작환경에 특화된 관리감독 제도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팀장급 스태프들은 ‘사용자’라는 이유로 근로기준법 적용을 못 받는다. 이를 ‘이한빛법’이라 부르는 이사장은 “올해엔 현장이 진짜로 변할 수 있게 면담부터 고발까지 더 적극적으로 임할 것”이라 말했다.

변화엔 방송노동자들 전반의 관심이 필요하다. 이 이사장은 이은규 전 MBC드라마 PD,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에게 고마워했다. 그는 “이 전 PD는 ‘우리가 바꾸지 못했던 제작현장이 지속돼 이한빛을 죽였다. 빚을 갚는단 심정으로 열심히 돕겠다’며 아들 사망 직후 먼저 나를 찾아왔다. 김환균 위원장은 현재 한빛센터 공동대표로 이름을 올렸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누가 너의 죽음을 나약하다 말하랴” 제목의 시를 자주 읽는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부당함을 외면치 않고 잘못됐다 말해 온 이 PD를 그린 시다. 이 PD는 사망 전 신념에 반하는 비정규직 스태프 해고 지시에 괴로워했다. 그의 중학교 시절 한 선생님은 “몇 계단만 참고 오르면 많은 걸 누릴 수 있다는 걸 너는 알았지만, 사람을 벌레로 밟고 오를 수는 없어서, 벌레로 밟히면서 벌레를 밟으면서 누릴 수는 없어서 훨훨 하늘을 향해서 몸을 던진 것이었더구나”라고 시를 썼다.

올해 이 이사장의 고민은 지속가능성이다. 그는 “센터가 유지되는데 필요한 후원회원을 절반밖에 모으지 못했다. 2년 차엔 센터 재정을 단단히 만드는데에도 매진할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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