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통영시 문화동 벅수골엔 나전칠기 장인 송방웅씨 집에서 아교 냄새가 진동했다. 우체국 앞 봉래좌는 1914년 문을 연 한강 이남 최초의 극장이었다. 봉래좌 아래 1945년에 문을 연 이문당 서점 2층엔 통영 문인협회가 있었다. 청마가 문인협회 한귀퉁이에서 연서를 써 바로 옆 우체국에 가서 부치면 100m쯤 떨어진 공민학교 교사 이영도에게 가 닿았다. 문인협회 옆 호심다방엔 전쟁통에 피난온 이중섭이 친구 전혁림과 전시회를 열었다.

손혜원 의원의 목포 구도심 건물매입을 놓고 여론이 뜨겁다. 손 의원은 통영 나전칠기에도 손댔다. 벽화로 유명해진 동피랑이 있는 통영도 목포 논쟁과 무관치 않다. 오랜 독재정권이 만들어 낸 개발연대의 습성이 몸에 밴 우리는 건물 하나를 30년 이상 가만 두지 못한다. 뭐든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한다. 보존도 개발처럼 해댄다.

동피랑은 바람이 강해 언 손을 부비며 연을 날리던 곳이다. 어릴적 통영은 모두가 동피랑처럼 가난했다. 철거를 기다리던 동피랑엔 2007년 가을 순식간에 벽화가 그려졌다. 푸른통영21이란 시민단체가 정부 지원을 받아 벽화를 그렸다. 거기서 그쳐야 했다. 그러나 벽화마을은 관광명소가 됐다.

▲ 동피랑마을. 사진=위키백과
▲ 동피랑마을. 사진=위키백과
▲ 동피랑마을. 사진=위키백과
▲ 동피랑마을. 사진=위키백과
당시 푸른통영21의 윤미숙 사무국장은 한국일보 2008년 11월28일 33면에 나온 기사에서 “철거 앞둔 마을을 찾았을 때 갈 데 없는 할머니들은 울고 있었다”고 했다. 반대로 조선일보 2008년 9월10일자 11면에 나온 한 동피랑 주민은 “이놈의 벽화 때문에 개발계획이 취소될 줄 알았으면 동의서를 안 써줬을 것”이라고 했다. 두 달 간격으로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는 동피랑을 정반대로 소비했다.

그래도 개발보단 보존이 좋다. 그런데 동피랑 개발계획은 서울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땅도 아니다. 통영시는 동피랑에 공원을 만들 계획이었다. 물론 낡은 집들을 확 밀어 버리는 개발연대 방식이었다.

벽화가 그려진 동피랑은 점점 베네치아가 돼 갔다. 최근 베네치아는 밀려드는 관광객 때문에 입장객 숫자를 통제한다. 주말 동피랑도 마찬가지다. 언론의 과잉소비 탓이다.

언론의 통영 사랑은 과했다. 언론은 전문가와 문인들을 동원해 동피랑을 소비했다. 조선일보는 2014년 1월16일자에 두 개 면을 털어 보존된 옛 마을들을 조망했다. 동피랑은 기사의 첫꼭지에 등장한다. 소설가 박성원이 나선 ‘J형 그런데 통영 말고 나폴리는 가보셨어요’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동피랑은 홍상수의 영화 ‘하하하’ 촬영지로 소개된다. 영화 속 김상경이 문소리를 만나고 유준상과 술 마시던 곳이라는 부연설명과 함께.

▲ 2008년 11월28일 한국일보 33면
▲ 2008년 11월28일 한국일보 33면
한국일보는 2008년 한 면 털어 동피랑을 ‘통영의 몽마르트’라고 극찬했다. 중앙일보는 2014년 1월10일자 4면 기사에서 명물이 된 ‘할머니 바리스타’까지 소환했다. 매일경제도 2014년 5월13일자 37면 기사에서 카페 ‘울라봉’의 욕쟁이 바리스타를 불러 내 ‘욕을 버린 욕쟁이 카페’란 제목을 붙였다. ‘쌍욕라떼’는 동피랑을 서술하는 고유명사가 될 지경이었다. 세월호 참사 직후 욕쟁이 바리스타가 욕을 안 한다는 것조차 기사가 됐다.

한겨레는 문화예술을 도구 삼아 통영을 소비했다. 한겨레는 2014년 9월25일 24면에 ‘백석과 이중섭, 윤이상이 거닐던 그 길가, 그 대폿집’이란 제목의 전면기사를 실었다. 이번엔 동피랑에서 내려다보이는 ‘강구안’이 소재였다. 이 지경이니 한 시인은 2013년 ‘통영은 맛있다’는 책까지 썼다. 해남 보길도가 고향인 시인이 썼다는 그 책을 볼 때마다 불편하다. 과유불급이다. 시멘트로 밀어 붙이던 걸 문화예술로 밀어 붙인다고 덜한 것도 아니다. 이제 그만 좀 놔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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