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미투 사건’에 대한 2차 피해를 낳는 보도가 무분별하게 양산돼 언론계 내 자성의 목소리가 컸으나, 언론은 체육계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며 같은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피해자 신상을 동의없이 유포하는가 하면 선정적·낚시성 기사 제목도 서슴없이 나왔다.

▲ 지난 8일 SBS 8뉴스가 보도한 ‘심석희 “조재범 전 코치가 ‘상습 성폭력’”… 용기 낸 호소’ 보도 갈무리.
▲ 지난 8일 SBS 8뉴스가 보도한 ‘심석희 “조재범 전 코치가 ‘상습 성폭력’”… 용기 낸 호소’ 보도 갈무리.

보도 직후 쏟아진 피해자 사진

지난 8~9일 온라인 기사 화면을 장식한 건 사건 피해자 심석희 선수였다. 8일 SBS가 심씨에 대한 조재범 전 코치의 성폭행 혐의를 최초 보도한 직후다. 그날 저녁부터 9일 오전 문화체육관광부의 ‘조재범 성폭력 폭로’ 근절 대책이 나오기까지 나온 보도 409건(사진 포함된 네이버 제휴 기사) 중 242건이 심씨 사진을 실었다. 조 전 코치 사진을 실은 보도는 86건에 그쳤다.

‘심석희법 받아쓰기’도 여론 뭇매를 맞았다.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장이 체육계 폭력 근절을 위한 국민생활체육진흥법 개정안을 ‘심석희법’이라 부른 걸 언론이 무비판적으로 반영했단 비판이다. 피해자 중심의 사건 명명과 피해자 이미지 남용은 가해자를 사건 중심에서 사라지게 해 책임 소재를 흐린다는 지적을 지속 받아왔다.

사진 무단도용 사태도 있었다. 지난 14일 유도선수 신유용씨 피해가 알려진 직후 국민일보·중앙일보·서울경제·연합뉴스·국제신문·중도일보·경상일보·일간투데이·경기일보 등 많은 매체가 신씨 SNS의 사진과 글을 도용해 기사화했다. 과도한 피해자 신상 노출을 금지하는 성폭력 보도 지침 위반이자 사생활 침해다.

▲ 디자인=이우림 기자
▲ 그래픽=이우림 기자

“귀에 X까지 넣어” 낯 뜨거운 선정성

언론중재위는 지난해 4월 2차 피해가 우려되는 미투사건 보도 112건에 시정권고를 내렸다. 이중 45%(50건) 가량이 신체부위 언급과 성적발언과 관련된 선정적 보도다. 가해 행위를 자세히 묘사한 자극적 보도도 58건이나 됐다. 언중위는 이를 계기로 시정권고 심의기준을 개정해 “선정적으로 묘사하면 안된다”는 문구까지 추가했다.

선정적 보도는 되풀이됐다. 신씨 사건이 알려진 지난 14일 헤드라인이 대표적이다. “‘매트리스로 올라오라고 한후 성폭행’... 전 유도선수 신유용 성폭행 피해 고백 '어쩌다 이런일이'”(글로벌이코노믹), “신유용 선수 누구? 유도 코치가 성폭행 후 ‘생리했냐? 산부인과 가봐라’ 말 듣기도”(국제신문), “신유용 성폭행 폭로. ‘일상’ 된 추악한 실체...‘귀에 X까지 넣었다?’”(국제뉴스) 등이다.

“몹쓸 짓, 검은 손, 짐승, 악마, 성관계, 더러운 욕망” 성폭력 사건 보도 시 언론이 관성적으로 잘못 써온 표현이다. 성폭력 범죄를 희화화하거나 사소하게 만들고 ‘억제못한 성욕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통념을 강화하는 것들이다. 한국기자협회가 지난해 6월 ‘미투보도’를 반성하며 여성가족부·여성노동지원법률센터와 함께 발간한 ‘성폭력·성희롱 사건 이렇게 보도해주세요’ 책자에도 담겼다.

관성도 그대로였다. 부산일보, 충청매일, 데일리안 등 십수개 언론사가 ‘조재범 몹쓸 짓’을 제목에 올렸다. 데일리안은 “조재범 추가고소 ‘경악할 검은 손’”이라거나 “조재범 인면수심 몹쓸짓”이라고 반복 보도했다. “조재범 심석희 14년 기구한 만남”(뉴스타운), “감내해야 했던 끔찍한 세월, 꿈의 공간이 '지옥'으로”(뷰어스), “그동안 그녀가 어두웠던 이유?”(아주경제) 등도 있었다.

▲ 사진= 지난 12일자 중앙일보 기사 페이지 화면 갈무리
▲ 현재 삭제된 지난 12일자 중앙일보 기사 페이지 화면 갈무리. 

관상 분석이 저널리즘?

‘조재범 관상’ 보도도 있었다. 지난 12일 중앙일보가 낸 “[백재권의 관상·풍수99] 순한 인상 뒤에 숨겨진 폭력성에 경악” 기사다. 이 기사는 백재권 관상학 강사의 주장을 토대로 조재범 전 코치에게 ‘순박한 인상’이라 평가하며 “지도하는 코치, 감독, 교수, 선생님의 외모에 속으면 안 된다”고 설명했다. 기사는 “어릴 때 폭력은 평생의 고통이다. 그 상처가 얼굴에 투영되기 때문에 관상을 보면 잡아낼 수 있다”며 2차 피해를 줄 수 있는 분석도 덧붙였다.

일부 매체는 노골적인 ‘낚시성 기사’를 썼다. 금강일보는 지난 10~12일 “조재범 코치 나이는? 30대 나이에…”, “'조재범 코치 나이' 화제 ... 결혼 여부는?”, “조재범 코치 나이, 결혼 유무 연일 화제 ... 가해자들 추가 폭로도 예고” 등의 기사를 냈다. 국제신문은 지난 14일 “신유용 성폭행한 영선고 유도부 코치 누굴까 관심 증폭 ‘결혼 후 내연녀와 바람’”을 제목으로 달았다.

내부 경각심, 매체 별 편차 컸다

편집기자들은 배경으로 우선 매체 별 차이를 꼽는다. 포털 제휴 매체와 비제휴 매체 간, 미투 국면 후 조직적 개선 노력을 한 매체와 아닌 매체 간 차이다. 편집기자 A씨는 “비제휴 매체는 규제가 없으니 검색어 기사를 변함없이 작성할 거고, 제휴매체 디지털뉴스팀도 데스킹 없이 바로바로 검색어 기사를 내게 돼 문구를 아무렇게나 써서 올린다. 구조적인 문제”라 말했다.

MBC는 지난 10일 “피해자에 고통을 줄 수 있단 우려를 감안해 피해자 이름을 지우고 가해자로 지목된 코치 이름을 따 ‘조재범 성폭행 의혹 사건’이라 부르겠다“고 밝혔다. 신유용씨 피해사실을 첫 보도한 한겨레는 피해자 신상을 공개하면서 거듭 숙고했다. 실명 공개 위험성을 피해자에게 알린 뒤 피해자 동의를 받았다. 한겨레는 신씨로부터 정면 얼굴 사진을 여러 장 받았지만 온라인에 공개될 경우 입을 2차 피해를 우려해 지면에만 실었다.

내부 노력은 매체 별 차이가 크다. 편집기자 B씨는 “언론계 자성의 목소리가 컸다곤 하나 전과 아무 변화가 없어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 언론사도 많다. 자살사건 보도할 땐 자살을 언급하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오지만, 미투사건은 문제가 불거질 때에도 관련 지침이 내려거나 토론을 한 적이 없고 지금까지 마찬가지”라 했다.

이소라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연구위원장은 이와 관련 “담당자를 정하든, 내부 체크리스트를 만들든 최종 출고 전 점검하는 내부 시스템이 필요하다. 2차 피해 보도를 징계사유로 만드는 등 처벌조항을 만들 수도 있다”며 “조직 개선 방법은 무궁무진한데 하지 않는 건 책임감이 부족해서다. 누리꾼들이 기자들보다 문제를 더 잘 지적하는 걸 보면 언론사 감수성이 일반인보다 더 늦게 발전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한편 스포츠지의 근본 역할을 묻는 질타도 나왔다. “터질 게 터졌다”거나 “체육계 내 고질병”이라 제목을 다는 스포츠지들이 정작 자기 책임은 외면했다는 지적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지난 11일 자신의 SNS에 “스포츠지는 경기를 보고 감독·선수 인터뷰해서 쓰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중계방송이나 통신사 속보를 보고 받아쓰는 경쟁도 많다. 사건 자체를 취재하는 분위기나 정교한 노하우가 점점 사라진다”며 “알 만한 사람은 다 안 다느니, 고질병이라느니 하는 표현을 스포츠 기관을 출입하는 기자가 하는 것을 보니 의아하다. 그 ‘알 만한 사람’에 기자들도 포함되는 게 아니냐”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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