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우연히 만난 폴(말론 브란도)과 잔느(마리아 슈나이더)는 아파트에서 섹스를 한다. 2013년 당시 감독은 이 장면을 두고 “배우와 합의되지 않은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리아 슈나이더는 2007년 인터뷰에서“나는 강간을 당했다고 느꼈다. 그 장면은 시나리오에 없었다”고 말했다. 촬영 당시 마리아는 19살이었다.

배우 반민정씨는 한국의 영화제작현장이, 적어도 여배우에겐 46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반씨는 2015년 4월16일 영화 ‘사랑은 없다’ 촬영 도중 강제추행을 당했다. 46년 전 영화와 마찬가지로 배우와 합의되지 않은 장면이었다. 지난 9월13일 대법원은 조덕제씨에게 징역1년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확정했다. 그러나 조씨는 유튜브 등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고 있고, 언론은 조씨의 주장을 검증 없이 받아쓰고 있다.

반씨는 강제추행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짜뉴스’의 피해자였다. 조덕제씨의 강제추행 재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반씨의 명예를 고의적으로 훼손하고자 허위정보를 유포했던 조씨의 지인 이재포씨는 1심 재판 기간 중 코리아데일리에 입사한 뒤 반씨에게 불리한 기사를 일방적으로 쏟아냈다. 이를 위해 그의 매니저를 코리아데일리 기자로 입사시키기도 했다. 결국 이씨는 지난 10월13일 2심에서 징역 1년6개월 형을 받았다.

▲ 배우 반민정씨. ⓒ반민정 제공
▲ 배우 반민정씨. ⓒ반민정 제공
올해 한국사회를 강타했던 미투 국면에서 반민정씨가 거둔 결과는 수많은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승리의 순간이었다. 반민정씨의 법정 싸움으로 인해 한국 사법부는 처음으로 영화촬영 도중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판례를 남겼다. 또한 이재포 사례를 통해 언론인이란 탈을 쓰고 언론자유를 악용해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을 시도한 행위는 엄벌에 처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도 남겼다.

지난 13일 미디어오늘 사무실에서 반민정씨를 만났다. 지난달 방송된 MBC 교양프로그램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 방송 이후 자신을 향한 응원의 메시지를 많이 받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반씨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2시간 남짓했던 인터뷰 내내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래는 반씨와의 일문일답.

-2015년4월16일 사건 이전에도 촬영현장에서 부조리한 상황들을 목격했나.

“신인 때였다. 친했던 배우가 다른 작품에서 주인공을 했는데 굉장히 힘들어했다. 노출이 있는 역할이었다. (촬영 뒤) 자기는 영혼까지 살해당했다고 했다. 그 다음에 배우를 그만 뒀다. 수년 뒤 당시 촬영감독을 통해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베드신을 찍을 때 ‘공사’를 안 했다고 했다. 그 배우는 실제로 당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촬영현장은 변하지 않았다. 그 때는 그 친구가 어떤 고통인줄 몰랐다. 실제로 겪으니, 그 친구가 어떻게 버텼을까….”(눈물)

-재판과정이나 수사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나.

“피해자에 대해 수사기관이 관대하다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수사도 많이 있었다.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거나…. 이 사건의 경우 조사가 굉장히 여러 차례 길게 많이 이뤄졌다. 너무 힘들었던 기억만 난다. 지금 봐도 질문들이 너무 힘든 질문들이었다. 피해자에게 대답하기 힘든 것들을 물어봤다.”

2016년 2월29일 1심 1차 공판일이 열렸다. 1심이 진행 중이던 7월8일 코리아데일리가 허위사실을 기사로 올렸다. 4일 뒤인 7월12일 조덕제씨는 재판부에 추가 변론을 요청했다. 5차 공판 뒤인 7월14일, 7월29일, 8월1일, 8월17일 허위사실이 차례로 기사화됐다. 반씨가 과거 합의금을 뜯어냈다는 내용의 일명 ‘식당사건’과 ‘병원사건’이다. 조씨측 변호사는 반씨에게 ‘기망의 습벽’이 있다면서 가짜뉴스를 적극 활용했다. 가짜뉴스는 “피해자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주변상황에 따라 사실을 왜곡하는 경향도 있다”는 인신공격의 근거로 사용되었다. 이후 11월14일 변론이 종결됐고 그해 12월2일 재판부는 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지난 11월 방송된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한 장면. ⓒMBC
▲ 지난 11월 방송된 MBC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의 한 장면. ⓒMBC
-1심에선 가해자에게 무죄가 나왔다. 2심에선 유죄가 나왔다. 상황을 반전시킨 변곡점은.

“1심에서 당연히 유죄가 선고될 거라 생각했지만 가짜뉴스로 재판부에 피해자에 대한 선입견을 주었고 그게 먹혔다고 생각한다. 회의감이 많이 들었지만 2심에서 하나씩 바로잡아나갔다. 2심 재판에서 변곡점은 영상이었다. 1심에서는 메이킹 영상과 사건영상에 대한 신문과정이 전혀 없었다. 2심에선 영상분석을 했다. 내가 당하는 영상을 보며 너무 힘들었지만 그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1심 때는 판사가 공판 도중 자고 있는 경우도 봤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2차 가해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 소송지휘권을 행사하며 적극적이었다. 1심과는 재판부의 분위기가 달랐다.”

-이재포 등은 가짜뉴스를 작성했고 디스패치는 당신의 신상을 노출시켰고 사실관계를 왜곡해 보도했다. 언론의 3차 피해로 겪었던 어려움이 컸을 것 같다.

“3차 피해가 제일 힘들다.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언론보도는 한번 확산되면 바로잡기가 힘들다. 바로잡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바로잡는 보도는 잘 안 해준다. 이재포 가짜뉴스가 아직도 남아있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언론은 진실만을 정확하게 보도한다고 생각했다. 언론은 거의 100% 신뢰했다. 재판부에서도 그랬을 것 같다. 가해자는 언론의 성향을 잘 알고 이용했다. 그렇다고 내가 가해자처럼 할 수는 없었다.”

▲ 코리아데일리의 허위기사 제목들. 디자인=이우림 기자.
▲ 코리아데일리의 허위기사 제목들. 디자인=이우림 기자.
디스패치는 11월16일 “조덕제 성추행 사건 보도와 관련해 성폭력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이 노출된 점에 대해 피해자께 사과드린다”며 관련 기사를 삭제했다. 당시 디스패치는 사건 영상 일부의 캡처본을 공개하며 ‘강제추행으로 보기 어렵다’는 영상분석 전문가 윤용인 박사 의견을 실었다가 정정하기도 했다. 윤용인 박사는 앞서 반민정-조덕제 2심 재판에서 정식감정의뢰를 받고 ‘강제추행 및 상해에 해당할 수 있다’는 감정 결과를 낸 바 있어 디스패치 보도는 조덕제씨에게 편향된 왜곡에 해당했다.

코리아데일리는 지난 10월4일 반민정씨에 대한 사과문을 내고 “피해자인 여배우에게 씻을 수 없는 마음의 큰 상처를 주었다”며 반씨와 관련된 기사를 모두 삭제했으며 영등포 세무서에 언론사 폐업 신고를 했다고 밝혔다. 이재포씨는 “언론을 권력인양 생각했던 제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는 내용의 반성문을 썼다.

반민정씨는 대법원 판결 이후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반씨는 말했다.

“…그 무엇보다 저는 이 판결이 영화계의 의미 있는 변화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연기와 연기를 빙자한 성폭력은 다릅니다. 폭력은 관행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잘못된 관행은 사라져야 합니다. …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의 룰을 파괴한다면 그런 예술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이번 판결이 한 개인의 성폭력 사건에서 그치지 않고 한국 영화계의 관행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선례로 남기를 바랍니다. 조덕제의 행위, 그것은,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

지난 9월13일 대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반민정씨가 발언하는 모습. ⓒYTN화면 갈무리
지난 9월13일 대법원 앞 기자회견에서 반민정씨가 발언하는 모습. ⓒYTN화면 갈무리
조씨가 반씨의 신체를 만지긴 했으나 업무(연기)에 해당해 처벌할 수 없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은 뒤집혔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연기행위를 벗어나 피해자와 아무런 합의도 없이 연기를 빌미로 피해자의 가슴과 음모를 만지는 강제추행 범행을 함으로써 상당한 정신적 충격과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나아가 피해자를 무고했고,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이 가중되게 했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면서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있다. 피고인에게는 이에 상응하는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설령 피고인(조덕제)이 감독의 일방적인 연기지시에 충실하게 따르려는 의도로 피해자(반민정)의 가슴을 만지고, 피해자의 바지 속으로 손을 넣은 것이라거나, 이 영화가 19세 미만 관람불가 등급을 전제로 촬영된 것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와 같은 감독의 일방적인 연기지시나 이에 따른 피고인의 연기내용에 관해 피해자와 사전에 공유하거나 피해자로부터 승낙을 받지 않은 이상, 그것을 단지 정당한 연기였다라고만 볼 수는 없고, 피고인의 위와 같은 행위로 인해 피해자는 상당한 성적 수치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신체의 일부 노출과 성행위가 표현되는 영화촬영 과정이라 하더라도 연기를 하는 행위와 연기를 빌미로 강제추행 등의 위법행위를 하는 것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하고, 연기나 촬영 중에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충분히 보호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2심 재판부의 판단을 확정했다.

-언론의 문제에 대해선 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다.

“대법원에서 강제추행 유죄판결이 난 범죄자의 말을 언론이 그대로 받아서 보도하는 행위 자체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조덕제는 성범죄자다. 이 사람이 말하는 건 거짓말이다. 제발 좀 이 범죄자가 거짓말하는 걸 받아쓰기 안 했으면 좋겠다. 언론이 받아쓰지 않으면 확산이 안 되지만, 보도가 되면 사실이 된다. 수습이 안 된다. 언론에 너무 당해서 기사를 안 본다. 지금 언론은 범죄자의 유튜브 채널을 홍보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은 끝났지만 오히려 언론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 게티이미지.
▲ 게티이미지.
-연기나 촬영 중에도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충분히 보호되어야 한다는 첫 판례를 이끌어냈다. 이 싸움을 통해 당신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내가 당한 피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길 원했다. 후배들에게 안전한 촬영현장을 주고 싶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해버리면, 나와 비슷한 피해자들이 생겨날 것이고, 지금 가해자처럼 나는 연기했다며 연기를 빙자한 성추행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내가 가르칠 학생들에게 나는 연기에 대해서 무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영화관계자들도 (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방관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는 1970년대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수준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사건 발생 이후 40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당신을 지탱해준 것은 무엇이었나.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연대가 도움이 되었다. 친구들도 있었다. 언젠가는 진실을, 사람들이 다 알아줄 거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저예산 영화라는 핑계를 대며 배우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내 사건 이후 민감한 장면을 찍을 때 리허설을 철저히 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더디긴 하지만, 이런 영화계에서의 성폭력 피해와, 다른 직장에서의 성폭력에 대해 좋은 결과들이 조금씩 나와야 한다.”

▲ 배우 반민정씨. ⓒ노컷뉴스
▲ 배우 반민정씨. ⓒ노컷뉴스
-지금도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이 확산·공유되고 있다. 앞으로 필요한 조치들은.

“범죄자에 대해 쓸 때 신중했으면 좋겠다. 사실관계라도 확인을 하고 보도했으면 좋겠다. 대법원 판결 이후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가해자에게 민사소송을 걸었다는 식의 주장도 있던데 역시 사실이 아니다. 이미 가해자가 2015년 먼저 민사소송을 제기했고, 형사사건 때문에 지금껏 멈춰있었다. 그러다 12월에 잡혔고, 가해자가 또 미룬 상황이다. 가해자는 내가 100명 이상의 누리꾼을 고소했다고도 주장하는데 역시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기자도 내게 물어보지 않았다.”

인터뷰 말미, 반민정씨는 “배우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소소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죽을 때까지 하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여전히 ‘좋은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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