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를 바꾸겠다고 80년대 노동현장에 들어온 많은 대학생이 1991년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자 ‘이제 할 일이 없다’며 썰물처럼 빠졌다. 1983년 성수공단 노동자와 함께 대중운동 속에 있던 나는 그 사람들이 이상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운동은 계속 활기를 띠고 할 일도 엄청 늘었는데 저들은 뭘 보고 할 일이 없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1983년 노동현장에 들어와 35년을 보낸 ‘87년 노동운동 1세대’가 퇴장한다. 전노협과 업종회의, 민주노총을 잇는 민주노조운동을 지켰던 김태현(61)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올 연말 정년퇴직한다. 민주노총 첫 정년퇴직자다.

민주노총 첫 정년퇴직하는 김태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김태현 연구위원은 서울대 법대 75학번이다. 이른바 긴조(긴급조치) 세대다. 그는 학생운동을 하기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4남 1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동생도 서울대병원 노조위원장을 지냈다. 지방공무원으로 한량처럼 경남 일대를 떠돌던 아버지는 집안 건사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사실상 집안의 가장(家長)이었던 큰형은 육사를 나왔다. 서울 보내야 인물이 된다고 중2 때 경남 마산에서 큰형님 집으로 전학왔다.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큰형 집에는 사촌 동생들까지 10명이 얹혀 살았다. 객 식구를 잔뜩 떠맡은 형수에게 월사금 얘기를 꺼내지 못해 학교에선 늘 핀잔을 들었다.

▲ 민주노총 첫 정년퇴직자인 김태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5일 35년 노동운동 소감을 밝히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민주노총 첫 정년퇴직자인 김태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5일 서울 서대문구 한 카페에서 자신의 35년 노동운동 소회를 밝혔다.  사진=김예리 기자

김 위원은 19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정부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있던 서울대를 관악구 신림동으로 옮긴 첫 해였다. 당시 서울대생을 ‘관악 1세대’로 부른다. 도심과 가까웠던 서울대는 50~70년대 거리시위를 주도했지만 “당시 관악캠퍼스는 허허벌판에 띄엄띄엄 건물이 들어서 황량했다”고 했다.

당시 서울대는 외관만 황량한 게 아니었다. 1972년 10월유신 이후 1974년 긴급조치 1호를 시작으로 암흑기였다. 김 위원의 신입생 봄날이 채 가기도 전인 1975년 4월8일 긴급조치 7호가 공포됐다. 7호는 고려대 휴교와 교내 집회·시위 금지였다. 곧이어 박정희 정권은 1~8호까지 긴급조치를 모두 해제하고, 1975년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공포한다. 긴조 9호는 긴급조치의 화룡점정이었다. 모든 집회와 시위 금지에 유신헌법 반대는 물론 개정 주장조차 금지했다.

김 위원이 대학에 들어가기 직전인 1974년 민청학련, 동아투위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많은 구속자를 냈다. 김 위원이 새내기 대학생이었던 1975년 4월11일 서울대 농대 복학생 김상진씨가 학내시위 도중 할복자살하자 박 정권은 한 달 뒤 5월13일 긴급조치 9호를 공포(公布)하고 공포(恐怖)정치를 강화했다. 서울대생들은 서슬 퍼런 긴조 9호에 열흘도 안돼 반기를 들었다. 이른바 ‘5·22 사건’. 서울대생들은 1975년 5월22일 김상진 추모시위를 벌였다. 학생운동 세력 대부분이 잡혀간 뒤라서 이 시위는 문화패가 주도했다. 다시 무더기 연행된 뒤 서울대 법대 73학번 이범영 박석운 백계문 삼총사가 1976년 12월8일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12·8 시위’를 벌일 때까지 1년 반 동안 암흑기였다. 김 위원은 이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2년을 보냈다.

서울대 법대 75학번으로 학생운동으로 두 번 체포·구속

김 위원은 1977년 3학년이 돼서야 학생운동을 본격 시작했다. 육사 나와 현역장교인 형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김 위원은 1977년 10월7일 서울대 사회학과 3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준비하다가 행사 당일 대학 측의 불허에도 행사를 강행했다. 김 위원은 조희연(사회학 75학번) 서울교육감과 함께 연행돼 한 학기 유기정학을 받았다. 이른바 ‘26동 심포지엄 사건’이었다. 당일 심포지엄이 열리는 26동 대형 강의동 앞에 모였던 400여 학생들이 학교의 불허 소식을 듣고 곧바로 농성에 들어갔다.

김 위원은 1978년 10월 다시 학내시위로 연행돼 구속됐다가 1979년 10월 박정희 사망으로 긴급조치가 해제되고서야 옥문을 나섰다.

김 위원은 “우리는 앞선 4.19, 6.3세대들과 다르게 유신정국을 경험하면서 학생운동만으로는 한국사회를 바꾸는 건 중과부적이라고 봤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1970년대 일정하게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원풍모방과 동일방적 등 민주노조도 일정한 숫자를 형성하던 시기였다. 학생운동만으론 안 되니 바닥의 민중운동과 결합하려면 노동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고 했다.

박정희가 죽고 나서 1980년에 복학한 김 위원은 “막연히 노동현장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준비는 없었다”고 했다. 80년 잠시 잠깐 열린 ‘서울의 봄’ 공간에서 김 위원 같은 대학생들은 혼돈스러웠다. 이해찬 선배는 정치투쟁으로 곧바로 나가야 한다고 했고, 80년 학생회장이었던 후배 심재철은 신군부가 재장악한 가운데 준비론을 펴면서 관망하자고 했다.

▲ 민주노총 첫 정년퇴직자인 김태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5일 서울 서대문구 한 카페에서 자신의 35년 노동운동 소회를 밝혔다.  사진=김예리 기자
▲ 민주노총 첫 정년퇴직자인 김태현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지난 5일 서울 서대문구 한 카페에서 자신의 35년 노동운동 소회를 밝혔다. 사진=김예리 기자

명망높은 이론가 누구도 ‘87년 노동자대투쟁’ 예견 못해

김 위원은 1982~1983년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고등학교와 서울대 법대 선배였던 이범영(법대 73학번)의 주선으로 최열 대표가 운영하는 공해문제연구소와 당시 진보진영 이론 생산기지였던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고 김근태 의원이 활약했던 민청련 건설에 참여했다. 김 위원은 1983년 9월30일 민청련 사무실 개소식을 끝내고 성수공단으로 들어갔다.

김 위원은 노동현장에서 80년대 중반 변혁운동에 불 붙은 노선논쟁을 목격했다. 김 위원은 서울대 ‘깃발과 반깃발’ 논쟁부터 NL(민족해방)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CNP 논쟁, 김문수의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이 말하는 ‘삼민헌법쟁취’, CA(제헌의회)그룹까지 논쟁 속에서 다양한 이론가들을 만났다. 김 위원은 “이론가들은 대중운동엔 무지했고 100년 넘은 박제된 혁명이론을 현실에 맞지도 않게 한국사회에 대입하려고 했다. 도무지 신뢰가 안 생겼다. 전위(혁명가)를 자처하려면 대중운동 속에서 성장해야 하는데 서로 싸우면서 갈라지더라. 내가 있던 성수공단에도 노선 논쟁이 불었다. 우리는 서로 터놓고 토론한 뒤 쿨하게 헤어졌다”고 했다.

노선 논쟁이 절정에 달했던 1987년 7월 갑자기 노동자 대투쟁이 터졌다. 노동자 대투쟁은 석달간 전국을 달궜다. 그해 1000여개 노조가 새로 생겼다. 김 위원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졌는데 그 쟁쟁하던 이론가나 어떤 노선도 터져나오는 대중운동에 아무 준비가 안 돼 있었다. 너도나도 노동조합으로 휩쓸려 가더라. 말만 했지.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더라. 그래서 노조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 위원과 인터뷰는 지난달 30일과 지난 5일 두 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아래는 김 위원과 일문일답이다.

구로공단 노동자와 한 한글공부 약속 못 지켜 마음의 빚

- 서울대 법대생이면 학생운동하다가도 공부해서 교수나 판검사가 되거나 정치하는 사람도 많은데.

“학생운동도 3학년에 늦게 시작했다. 3학년 가을에 정학 맞고. 돌아와 보니 친구들 상당수가 고시공부하러 가더라. 의지 가지를 잃은 느낌이었다. 다들 제 살길 찾아 떠나는데 나 한 명 정도는 운동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구로구에서 야학도 했는데, 야학을 한 건 학생운동이 끝이 아니라고 여겨서다. 당시 구로공단엔 전자공장은 중졸, 섬유는 초졸이 많았다. 전자공장은 영어로 된 제품 이름이라도 알아야 했다. 그래서 전자쪽이 섬유보다는 임금도 좀 나았다. 전자공장엔 한글도 못 읽는 노동자들이 중졸이라고 속여서 입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에게 한글 공부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78년 가을에 구속되면서 약속을 못 지켰다. 마음의 빚이었다. 또 1991년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자 많이들 이탈했다. 당시 나는 노조(병원노련)에 있었기에 대중운동이 급격히 성장하는 걸 두 눈으로 봤다. 대중운동이 성장하고 할 일이 많아졌는데, 할 일이 끝났다고 이탈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됐다. 그들은 전혀 실사구시하지 않더라.”

- 병원노련에 들어갈 때 상황은?

“서울엔 제조업 중심으로 1988년 서노협이 결성됐다. 내가 들어간 병원노련은 1987년 협의회로 출발해 1989년 노련으로 확대발전했다. 대부분 제조업에 들어갔으니, 나 아니어도 제조업엔 사람들이 넘쳤다. 당시 병원노련은 약사로 이대병원노조를 이끌던 양건모 위원장이 있었다. 병원노련부터 정책 일을 맡아 민주노총에 와서도 줄곧 30년 동안 노조 정책 일만 맡았다. 병원 등 여러 업종노조가 모인 ‘업종회의’에도 실무자로 참여했다. 1989년 전교조가 결성과 동시에 1000명 넘는 해직자를 내면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업종회의’는 제조업과 비제조업 노조를 묶어 세우면서 전교조를 도우려고 1989년 힘을 합쳐 11월 전국노동자대회를 공동으로 준비하고 성사시켰다. 연세대에 모인 수만명의 노동자 물결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다.”

1991년 대거 이탈에 “대중운동은 커지는데 웬 이탈?”

- 1990년 전노협 결성에 이어 1995년엔 민주노총이 결성됐다.

“1990년 전노협이 결성됐을 때 서울에선 지역특성에 걸맞게 제조업이 많지 않아 많은 노조가 결합하진 못했다. 제조업 외엔 출판노협과 시설노련 정도가 서노협에 결합했다. 전노협이 탄압을 뚫고 확장성이 생겼더라면 계속 갔을 것인데 전노협은 출범 이후 모진 탄압을 받으며 막판엔 2~4만명으로 줄어들고, 제조업 안에서도 조선노협이나 자노련 등이 결성돼 새로운 그릇이 필요했다. 1994년부터 민주노총 건설을 위한 실무논의를 시작했는데 병원노련에선 내가 나가고 전문노련(현 공공운수노조)에선 이근원, 전교조에선 최철호, 전노협에선 김유선 등이 나왔다. 민주노총 출범은 그 자체가 노동법 개정투쟁의 산물이었다. 87년 이후 대표적 노동악법인 제3자 개입금지와 복수노조 금지 조항 때문에 많은 고통을 받아온 민주노조는 노동법 개정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노태우 정권 말기엔 구속자만 1800여명에 달했으니 심각했다.”

- 1995년 민주노총 건설 초기엔 어땠나?

“김영삼 정부 때인데, 최초의 문민정부라 탄압 일변도에서 조금 상황이 바뀌었다. 탄압도 하면서 유인정책도 폈다. 당시 박세일 교수 같은 이가 청와대에 근무했는데 기존 탄압 위주의 노동정책으론 안 된다며 유인책을 내놨다. 그래도 김영삼 정부 내내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다 법외노조였다. 박세일 배무기 교수 같은 이들이 이젠 노동운동도 대결적 구도보다는 국민적 운동으로 바꿔가야 한다며 서구의 노사정 합의모델을 소개하곤 했다. 정부는 노동법개정을 위한 위원회(노개위)를 만들어 법외노조인 민주노총을 참여시켰다. 우리는 교섭하면서 싸움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계속 현장교육에 매진했다. 이때부터 해마다 여름에 현장의 노조대표자를 1000명 이상 한 자리에 모아 수련대회를 열었다. 그 시절엔 민주노총 중앙과 노동현장이 바로 연결돼 있었다.”

- 민주노총 건설하고 1년 남짓 만에 96·97년 총파업이 벌어졌다.

“노개위 공익안보다 더 개악된 정부입법안이 나왔다. 선제파업하자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현장을 믿고 입법상황을 예의주시했다. 당시 민주노총이 삼선교 근처에 있었는데 실시간으로 국회 상황을 전달받았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가 위원장 등 지도부가 밤늦게까지 토론하다가 여관에 가서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나니 새벽에 국회가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게 TV 보도됐다. 당시 김영대 사무총장 대행이 산별노조에 전화한 뒤 곧바로 현대차 기아차 노조에도 전화했다. 1년여 교육하고 토론한 보람이 있었다. 기아차노조 위원장은 ‘바로 오전부터 파업 들어가겠다’고 했다. 정갑득 현대차 노조위원장은 ‘오전에 회의해서 오후에 파업 들어가겠다’고 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명동성당으로 진입했고, 파업을 마친 노동자들이 저녁에 명동성당으로 몰려왔다. 김영삼 정부가 노동법 개악과 함께 안기부법도 한꺼번에 날치기 하는 바람에 시민단체도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경제파업과 공권력투입에 연대하는 정도에 그쳤던 민주노조는 처음으로 정치적 내용을 내걸고 전면전을 벌였다. 정권은 하루이틀 만에 끝날 거라고 여겼지만 노동자들의 분노는 해를 넘겼다. 1997년 1월4일 다시 파업의 불씨가 타오르자 국제노총도 뭔 일인가 싶어서 잇따라 한국을 찾았다. 그들이 우릴 보고 신자유주의 재편 구도에 전세계 최초로 파열음을 낸 획기적인 파업이라고 알려줬다.”

- 또 1년 뒤엔 IMF를 맞았다.

“정부와 자본은 원칙도 없이 사람을 잘랐다. 정부는 1명이라도 더 자르라고 자본을 압박했다. 현대차가 표적이 됐다. 공장 안에 천막 100여 동을 치고 옥쇄파업에 들어갔다. 버티던 김광식 위원장은 정권 차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정리해고에 도장을 찍었다. 현대차 고용안정파업은 노동계에 많은 교훈을 줬다. 정권은 정리해고에 도장을 찍었던 위원장을 구속시켰다. 현장은 현장대로 그를 배신자라고 낙인 찍었다. 3년형이 절반을 넘겼을 때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면 사면시켜준다는 얘기가 나와서 상고를 포기했는데 정작 사면 명단에선 빠졌다. 결국 3년형을 다 채우고 풀려났다. 끝까지 옥쇄파업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교훈은 2009년 쌍용차 파업 때도 그대로 적용됐다.”

- 1999~2000년 진보정당 건설 땐 어땠나?

“1997년 노개투 총파업이 끝나고 민주노총의 위상이 높아졌다. 조합원도 크게 확대됐다. 그럼에도 법 개정에 의미 있는 성과를 내진 못했다. 당연히 노동자 정치세력화 요구가 나왔다. 당시 단병호 위원장과 심상정 의원은 진보정당 건설이 시기상조라며 유보적 입장을 보였다. 공공연맹의 양경규 위원장 노력이 컸다. 권영길 위원장도 나중에 양경규 위원장 의견에 동의했다. 그렇게 민주노총이 나서서 2000년 민주노동당을 건설했다.”

“2000년대 중반 내부갈등 때 가장 힘들었다”

- 민주노총은 2000년 7개 대산별로 재편하는 발전전략위원회 보고서도 발표했는데, 요즘은 어떤가?

“나는 2006년 이후로 그런 얘기를 안 한다. 18년전엔 대산별 재편 등 조직발전 전략이라도 내놨지만, 지금은 그럴 엄두도 못낸다. 산별연맹들은 겉으로는 발전전략 다시 논의하자지만 민주노총 차원의 산별 구획안이 나오면 늘 ‘우리가 왜 저들과 같이 해야 하느냐’고 반발한다. 노조조직률이 낮은 영미식 노조모델에서 이런 갈등이 심하다. 요즘은 민주노총 안에서 조직갈등이 자주 일어나니까, 일부에선 ‘조직갈등조정위원회’ 같은 걸 만들자고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반대다. 그 위원회가 결정한 걸 해당 노조가 수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되더라. 지금은 엉망진창이 돼 간다. 민주노총 내 공공서비스 부문만 보더라도 공공운수노조와 서비스연맹, 보건의료노조, 민주일반연맹, 여성노조 등 5개 크고작은 산별노조가 있다.”

- 노동운동 한 걸 후회한 적은 없나?

“노사정위 참여를 놓고 대의원대회 신나 사건 등이 벌여졌던 2000년대 중반에 힘들었다. 정파 간의 골도 깊어졌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대중운동 속에서 내용을 채우는 게 맞다. 운동 속에서 인생을 마무리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떠나서 더 그렇게 결심한 것 같다. 나의 정년퇴직을 ‘87년 노동운동 1세대’의 퇴장으로 본다. 1세대가 많은 성과도 냈지만 한계도 많았다.”

- 가족들은 노동운동을 어떻게 생각하나?

“80년대 중반 성수동에서 만났다. 아내는 연세대 79학번으로 다니다가 학과가 맘에 안 들어서 재수해서 다시 같은 대학 사회학과 80학번으로 들어가 역시 운동하는 사람이었다. 아내도 자양동에 있던 대동화학에서 해고된 경험이 있으니 믿고 응원해줬다. 여동생도 서울대병원 2대 노조 위원장으로 1990년과 1992년 두 번이나 구속돼 노조 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 민주노조운동사를 정리해보는 건 어떤가?

“30년 동안 민주노조에서 정책 일을 했으니 여러 곳에서 책을 써 보라고 제안하더라. 그 전에도 몇몇 분들의 자서전 같은 게 나왔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리하는 책을 준비 중이다. 학생운동 하다가 노동현장 들어간 얘기까진 썼는데, 거기서부터 막혔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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