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교가 대표로 돌아왔다. tvN 드라마 ‘남자친구’의 호텔 체인 대표 차수현역이다. 정치인인 아버지 선거운동을 돕다 연예인만큼의 인지도를 얻었다. 재벌가 며느리 생활을 접고 이혼 위자료로 받은 호텔 사업을 이끌어 가는 역할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한동안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손예진도 안방을 찾았다. 올해 3월부터 5월까지 방영된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주인공 윤진아 역을 맡았다. 올해 상반기 화제성 1위 드라마로 꼽히며 인기리에 종영했다.

▲ tvN 드라마 ‘남자친구’
▲ tvN 드라마 ‘남자친구’

올해 초와 연말 나란히 등장한 송혜교와 손예진은 공통점이 있다. 곧 40대를 앞둔 30대후반 여성이라는 점. ‘늙은 밀레니얼 세대’다(‘늙은 밀레니얼 세대’는 책 ‘90년대생이 온다’에서 재인용한 개념이다. ‘i세대’ 저자 진 트웬지가 명명한 세대 구분이다. 1980년대 초반 출생을 1990년대생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다).

한국 드라마와 방송, 영화까지 영역을 넓혀도 30대말 40대초 여배우들의 배역은 거의 없었다. 연예계에서 여배우의 역할은 흔히 “촬영장의 꽃”으로 불린다. 극중 역할과 상관 없이 예쁜 얼굴과 친절함으로 촬영장을 환하게 밝히는 역할이다. 극중에서도 대부분 주요 흐름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여배우가 필요한 로맨틱 코미디물이나 멜로물에서야 주인공을 맡을 수 있지만 대부분 고분고분하거나 엉뚱하거나 하는 단순한 캐릭터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정형화된 여배우 캐릭터는 20대를 넘긴 여배우의 설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문소리가 직접 연출, 출연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그린 “데뷔 18년 차 연기파 여배우’ 설정은 꽤나 현실적이다. “며느리, 딸, 엄마, 아내 역할로 만취 상태”인 여배우는 “정작 맡고 싶은 배역의 러브콜이 끊긴지 오래”다.

2015년 KBS2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 ‘레이디 액션’은 20대를 지난 여배우의 생존을 향한 도전이었다. 조민수, 김현주, 손태영, 이시영, 최여진, 이미도 등 1983년생부터 1965년생까지 30~50대 여배우가 액션 연기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다. 제작진은 여배우 중에 액션 전문가가 없다는 점과 나이가 들수록 남배우에 비해 배역을 맡기 어렵다는 점을 프로그램 제작 이유로 밝혔다. 하지만 ‘레이디 액션’이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막을 내리면서 여배우의 액션 도전도 끝났다.

손예진과 송혜교의 등장은 이런 점에서 색다르다. 두 드라마 모두 여주인공이 실제와 비슷한 30대 후반 나이대의 역할을 한다. 이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말이 되어버린 ‘골드미스’란 명명이 등장하고 약 10여년 만에 드라마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 2015년 KBS2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 ‘레이디 액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조민수 김현주 최여진 이미도 이시영 손태영.
▲ 2015년 KBS2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 ‘레이디 액션’.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조민수 김현주 최여진 이미도 이시영 손태영.

30대 후반 여주인공은 이전과 달라졌다. 애인에게 더치페이를 요구하거나 데이트 비용을 전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밥을 “잘 사주는” 정도의 ‘독립성’을 지녔다. ‘남자친구’에서는 나아가 “승차감이 장난 아닌 차”를 몰아 “얼마니, 너는”이라며 연하의 남자주인공은 꿈도 못 꿀 정도의 재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캐릭터 변화가 최근 미투 국면 이후의 ‘페미니즘’이나 ‘여권신장’ 같은 흐름을 반영한다고 하기엔 미흡하다. 캐릭터는 약간 변하고 그보다 많은 부분을 답습한다.

손예진은 극중에서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졌다.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였던 손예진(윤진아 역)은 스스로 헤어나올 기회를 놓쳤다. 연하의 정해인(서준희 역)이 때마다 정의의 사도로 등장해 손예진을 구해낸다. 일부에서는 정해인의 ‘나이어린 꼰대’스러움에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남자친구의 송혜교와 박보검은 각각 회사 대표와 신입사원 역을 맡는다. 브라운관 TV에서 흔하게 봤던 ‘본부장과 신입사원’ 조합이 디지털 TV 시대에는 성별만 바뀌어 나온 듯한 조합에서 새로움을 찾기란 어렵다.

두 드라마의 공통 분모인 ‘연하’ 남자 애인을 둔다는 설정만이 새롭다면 새로울 수 있다. 매력·경제력을 갖춘 싱글 여성에게 고리타분한 연상 남자가 아닌 ‘연하남’만이 새로운 판타지를 제공한다.

오랫동안 방송사의 주요 타겟층은 여성이었다.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를 거치면서 여성상은 변했다. 변화는 빨라져 2017년과 2018년 여성들의 사고방식에도 큰 차이를 보인다. 여론에 민감한 방송사가 주요 시청층의 변화를 최근 여주인공의 캐릭터에 반영해 손예진과 송혜교가 30대 후반 여주인공을 맡을 수 있었다. 그마저도 10여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말이다.

그나마 이런 변화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이라는 표피적인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여성의 독립성과 고민 같은 내면의 변화를 드라마에서 찾아 보긴 어렵다. 자본은 기민하게 여성의 변화를 알아챘지만 깊은 고민까지 담아내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남자친구’가 이제 4회 방영한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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