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밤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水墨)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積雪)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밋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孤高)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시인 김종길(1926~2017)은 시 ‘고고’(孤高)에서 북한산 인수봉의 ‘멋’을 ‘가볍게 눈을 쓴 산 봉우리’에서 찾았다. 함박눈이 내린 산이 아니라 눈이 봉우리만 옅게, 나머지는 차갑게 검은 정취를 드러낸 모습이어야 한다고 했다. 신록이나 단풍처럼 알록달록한 산에선 ‘고고’한 멋을 찾을 수 없다고 잘랐다. 왜 아름다운 산을 놔두고 ‘고고’(孤高)한 멋을 산에서 찾았을까. 그는 인간의 ‘교언영색’을 경계했다. 두꺼운 화장으로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한 이들에게 현혹되어선 안 된다고. 그 모습이 벗겨지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 기다리라고 이야기했다.

▲ 2017년 12월 설산으로 변한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 ⓒ 연합뉴스
▲ 2017년 12월 설산으로 변한 북한산의 인수봉과 백운대. ⓒ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집권 초기의 모습이 떠올랐다. 문 대통령이 이낙연 국무총리, 서훈 국정원장, 임종석 비서실장 등을 일일이 호명하며 인사 취지를 소개했다. 전임 박근혜 정부가 ‘불통’이었기에 이런 모습은 신선을 넘어 파격에 가까웠다. 청와대에서 커피를 들고 산책하는 장면은 또 어땠나. 이전 권위주의 정부가 주지 못한 탈권위주의 정부 서막이었다. 이 총리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소통하지 않는다”는 야당 의원의 지적에 “막걸리 회동을 하고 있다”고 받아치는 장면은 사이다 같았다. 여기에 탁현민 행정관이 대통령 기자회견 등에서 보여준 콘서트를 방불케 하는 장면들은 이 정부가 소통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천명했다. 필자는 가끔 이런 ‘멋 부림’이 과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높은 국정 지지도를 유지하는 버팀목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올해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것이 무색하게 북미 대화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북한 관계에 무게 중심을 싣던 정부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GP 철수, 남북 철도 연결과 같은 뉴스가 이어지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평양냉면’ 때처럼 호의적이지 않다.

▲ 지난해 5월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을 나와 차담회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 지난해 5월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을 나와 차담회를 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야당과 정치적 협상을 시도했다는 문 대통령 이야기는 좀처럼 듣기 힘들었다. 한때 같은 청와대에서 일했던 제1 야당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과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는 ‘정치의 미학’도 기대했건만 여태 만남조차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문재인 정부도 역대 정부처럼 지지도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정부 부처 대변인실 한 공무원은 “국정 지지도가 떨어지면 각 부처 홍보라인에 비상이 걸렸다. 지지도를 올리는 방안을 부서마다 내달라고 (청와대에서) 닦달했다”고 호소했다.

꽃 피는 봄이 가고 신록의 여름과 단풍의 가을이 가버리고 차가운 겨울이 오고 있다. 이젠 어떤 색깔로도 이 정부를 꾸미기 어렵다. 수묵화처럼 북한산 인수봉에 옅은 눈이 내린 것처럼, 대통령이 꾸밈없이 ‘직접’ 나서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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