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군사법원은 지난 8일과 19일 여군 부하를 성폭행한 혐의를 받는 남성 해군 간부 2명을 무죄 판결했다. 이유는 ‘피해자 기억이 과장·변형됐을 가능성이 있고 폭행이나 협박을 입증할 수 없다’로 요약된다. 징역형을 선고한 1심을 깨는 판결이었다. 앞서 보통군사법원은 군형법상 강간치상 등 혐의로 박아무개 소령에게 징역 10년을, 김아무개 대령(사건 당시 중령)에게 8년을 선고했다.

고등군사법원 특별부(재판장 홍창식)는 피해자와 박 소령이 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 등 원심의 주요 사실관계 판단을 인정했다. 2심은 ‘피해자가 본인 경험을 그대로 진술’하고 있으며 ‘주요 부분에서 전체적 일관성을 유지한다’고도 인정했다. 그러나 판결은 뒤집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장은 “무죄는 징역 8~10년과 완전히 반대되는 판결”이라고 했다. 고등군사법원이 정반대 판결한 주요 논리는 무엇일까.

고등군사법원은 피해자에게 강간 요건을 엄격 적용하는 ‘최협의설’을 적용했다. 이 최협의설을 판례 흐름과 달리 적용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녹색당과 군인권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5개 여성‧성소수자·군인권단체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회견을 열고 고등군사법원의 판결 논리를 짚었다. 이들은 이번 판결이 군대 내 여군의 위치 등 피해자가 성폭력에 취약한 지점을 무시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 녹색당과 군인권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5개 여성‧성소수자·군인권단체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녹색당과 군인권센터,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15개 여성‧성소수자·군인권단체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김예리 기자

사건은 7년 전에 일어나 양측 모두 직접 증거는 사라진 상태다. 당초 사건화를 원하지 않던 A대위는 헌병수사관과 법무관의 ‘성폭력에 공소시효는 없어야 한다’는 설득 끝에 지난해 고소장을 제출했다.

박 소령은 피해자 A대위의 직속 상사였다. 김 대령은 배의 최고책임자인 함장이었다. A대위는 처음 함정에 배치돼 4개월이 지난 중위였다. 함정의 150명 정원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 군인이었고, 성소수자이기도 하다.

A대위는 2010년 9~11월 사이 박 소령에게 10회의 강제추행과 2건의 강간 피해를 겪었다. A대위는 이 과정에서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A대위는 함장인 김 대령에게 성폭력 피해를 보고하고 휴가를 받았다. 김 대령은 임신 중지 수술을 받고 함정에 돌아온 A대위를 숙소로 불러 성폭력을 가했다.

고등군사법원은 ‘물리적 반항을 했거나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일 때만 강간이 성립한다고 봤다. 최협의설이다. 박 소령은 1심 때부터 합의 하에 이뤄진 성관계라고 주장했다. 고등군사법원은 ‘강간죄 구성요건인 폭행·협박이 동반되지 않았기에 강간죄가 성립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 대령은 ‘묵시적 합의’ 하에 성적 접촉이 이뤄졌지만 성폭력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장은 “피해자는 초급장교로 당시 23세였고, 가해자는 최고책임자이자 함장이었다. 수직 위계적인 군대조직에서 초급장교와 대령 사이 ‘묵시적 합의’가 과연 가능한지 재판부에 묻고 싶다”고 했다.

이들은 군사법원의 이번 판결이 기존 판례 경험칙과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A대위가 한 주요 진술의 일관성을 인정하면서도 주변부의 구체적 사실들을 들며 ‘강간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반면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보통 판례들을 보면 양팔을 누르는 폭행으로도 강간죄 유죄를 선고한다. 그런데 고등군사법원은 ‘양팔을 눌렀다는 유형의 물리력 행사는 일반 성관계에도 있을 수 있어 폭행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식의 논리는 총 12건의 모든 공소사실에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26일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차혜령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가 26일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1심과 달리 2심은 두 피고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박 소령 부인의 진술을 판결문에 인용했다. A대위가 박 소령에게 문자 메시지로 ‘아저씨’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증거는 없었다. A대위는 단 한 차례도 ‘아저씨’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함께 근무하던 복수의 동료 군인들도 “박 소령이 초임 장교를 강압적 태도로 심하게 질책했고 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다”고 A대위 손을 들어줬다. 최란 팀장은 “1심 판결문에선 박 소령 부인 주장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2심은 가해자 주장을 더 중요하게 봤다”고 덧붙였다.

김 대령은 핵심 진술을 번복했다. 최란 팀장은 “김 대령이 처음엔 피해자를 관사에 부른 적 없다고 진술했다가, 재판이 진행되면서 ‘와도 된다’는 말은 한 적이 있다고 말을 바꿨고, 이후 ‘묵시적 합의’에 의해 성적 접촉이 있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주변 정황에 어긋나는 주장도 있었다. 김 대령 측은 성폭력을 가할 수 없었다는 근거로 ‘1년 반가량 전 수술을 받아 무릎을 구부릴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이들 진술을 받아들였다. 좁은 계단이 많은 함정에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하면 어떻게 일을 했겠냐는 반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고등군사법원은 “피해자가 약 7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억이 변형 혹은 과장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최란 팀장은 “피해자는 피해 직후부터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렸고, 함정을 옮길 때마다 적어도 함장 등 1명에게는 성적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렸다”며 “재판부가 피해자의 일관된 핵심 주장은 배척하고 가해자 주장만 받아들였다”고 했다.

2심 판결이 군의 특수성, 특히 해군 내 여군의 위치를 외면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예비역 여군 단체인 젊은여군포럼의 김은경 대표는 “전 군에서 여군 비율은 5~6% 수준이고, 해군에선 1만명 가운데 50~60명 꼴”이라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20일 이상 망망대해에서 동료들 사이에서 자신만 성폭력 피해자가 된 고립감을 상상해보라”며 “상관이 ‘돌격 앞으로’ 하면 나가서 죽음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에서 상관의 말과 행동은 협박 이상의 힘”이라고 말했다.

▲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전 대위)가 26일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김은경 젊은여군포럼 대표(전 대위)가 26일 '해군간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 무죄판결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차혜령 변호사는 “이 사건은 전향적 판결이 필요하다기보다 기존 판례 방향과 일치하는 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달 대법원은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 문화와 인식, 구조”를 들며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 관계 및 구체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판시하고 2심이 무죄선고한 강간 사건을 돌려보냈다. 이들은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 동의가 18만 명에 달하는 등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고등군사법원의 오판을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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