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 ○면세점 A업체 직원 강아영씨(22·가명)는 고교 졸업 직후 들어간 첫 직장에서 ‘사회의 쓴맛’을 봤다. 5개월이 지났는데도 300만 원 넘는 체불임금을 아직 못 받았다. 편의점 도시락을 옆에 끼고 퇴근하던 길, 강씨는 원룸촌 길목에서 ‘무엇이든 물어보라’ 입간판을 봤다. 강씨는 냉큼 다가가 물었다. “밀린 월급 어떻게 하면 받아요?”

강씨는 8번째 ‘넙디상담소 손님’이었다. 공공운수노조 인천공항지역지부와 공항항만운송본부 활동가들은 지난 8월 중순부터 매주 목요일 인천 영종도 넙디마을에 임시 노동상담소를 설치했다. 장소는 ‘598·203’ 버스정류장 맞은 편, 인천공항 출·퇴근 직원들이 밀집하는 곳이다. 맨땅에 헤딩으로 시작됐지만 입소문을 타며 하루에 한 명꼴로 상담소를 찾았다. 미디어오늘은 9번째 넙디상담소가 열린 지난 18일 저녁 6시30분터 2시간 가량 상담소 현장을 지켜봤다.

▲ 지난 18일 저녁 인천 영종도 넙디마을 버스정류장 인근에 노동상담소가 설치됐다. 사진=손가영 기자
▲ 지난 18일 저녁 인천 영종도 운서동 넙디마을 버스정류장 인근에 노동상담소가 설치됐다. 사진=손가영 기자

대형 신도시 사이에 낀 원룸촌 ‘넙디’, 공항 청년노동자 흡수

강씨는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30분 넘게 상담했다. 그만큼 할 말이 많았다. A업체는 ‘돈이 없다’며 5~10일 임금을 늦게 준 적도 많았다. 하루 최소 9시간씩 서서 일하고 쥐는 돈은 한 달 180여만원. 면세점 판매업계는 ‘노동법 위반 천국’이었다. 강씨는 임금체불된 다른 업체 직원을 여럿 봤고, 심지어 회사가 4대 보험료를 6개월 넘게 안 내 단체로 독촉장을 받은 직원들도 봤다.

“너희 다른 데 가도 이런 일자리 못 구해. 너희 나이에 이 정도 주는 데 없어.” 더 싫은 건 관리자의 정당화였다. 강씨는 “이렇게 세뇌시키니 다들 꾹 참고 일한다”고 했다. 강씨는 19살부터 일을 시작했다. 근로계약서를 읽지도 않고 서명했고 시키는대로 일했다. 공항엔 강씨처럼 10대 후반~20대 초반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청년들이 많다.

실제로 상담소가 만난 11명 모두 20~30대 청년이다. 상담을 맡은 한재영 조직국장은 “넙디는 청년밀집지역이다. 24시간 가동되는 공항에 이들을 원활히 공급하기 위해 만든 계획단지로 추정된다”고 했다. 넙디마을은 지난 5년 전부터 본격 단독주택단지로 변했다. 논밭지대가 4000여세대 원룸촌으로 바꼈다. 위로는 인천신도시와 운서 상권이, 아래로는 영종하늘도시가 있다. 돈도 없고 동거가족도 없는 청년노동자에겐 넙디가 가장 적절했다.

▲ 노조 활동가가 상담소를 찾아온 청년을 상담 중이다. 사진=손가영 기자
▲ 노조 활동가가 상담소를 찾아온 청년을 상담 중이다. 사진=손가영 기자
▲ 인천 영종도 운서동 넙디마을에 설치된 임시 노동상담소 풍경. 사진=공공운수노조 인천지역지부
▲ 인천 영종도 운서동 넙디마을에 설치된 임시 노동상담소 풍경. 사진=공공운수노조 인천지역지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5만원. 넙디 원룸촌 평균 시세다. 대부분 최저임금보다 월 20~30만원 더 받는 공항 청년노동자에겐 큰 부담이다. 집값을 빼면 150만원을 손에 쥐는데도 ‘임금꼼수’로 소득이 더 줄었다. △항공사 소속 보안요원은 계약서 독소조항 때문에 연차를 쓰면 월급이 깎였다. 법정 최저임금을 못받는 항공사 하청 직원도 아직 있다. 모두 넙디상담소에 접수된 사례다.

영종도 안 공항·항공·물류·호텔, ‘청년 싼값 노동’ 밟고 발전

‘연차를 못써서 힘들다’는 상담이 가장 많다. 공항은 24시간 운영되고 항공사는 비행기 출·도착에 맞춰 근무시간을 배정해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다. 교대제가 보편인데도 그만큼 인력지원은 없으니 인력 쥐어짜기 경영이 판친다. 하루는 20대 초반 여성 3명이 유니폼만 급히 갈아입고 와 ‘보건휴가도, 연차도 쓰지 못해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항공사 하청업체는 하루 최소 2명을 배치해야 할 보안업무 자리에 1명을 배치해 그를 하루 2번씩 출근시켰다. 일이 덜한 4~5시간 동안에 그를 귀가시켰다.

딸이 대한항공 하청업체에 다닌다며 잠옷 바람으로 나와 노동자 권리수첩을 챙겨 간 어머니도 있고 인근 약국에서 일하는 여성이 대여섯살 아이와 함께 나와 상담소를 찾은 적도 있다. 공항 주변엔 물류업, 지상조업, 리조트·호텔 등의 산업도 발달한다. 여기에 종사하는 청년들도 넙디에 산다. 상담소엔 이미 인근 물류업체 청년 노동자 2명이 다녀갔다.

상담 진행 동안, 활동가들은 백방으로 노동조합을 홍보했다. 두세명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하차하는 청년들에게 ‘노동자 권리수첩’과 ‘아플 때 붙이세요 노조밴드(대일밴드)’를 쥐어줬다. 박혜진 전 MBC 아나운서가 녹음한 ‘노조할 권리’ 라디오 광고 오디오도 무한 재생됐다. 3주 전엔 원룸 400세대 우체통에 홍보물을 직접 배달했다. 권리수첩은 지금까지 1500여개 가량이 나갔다.

▲ 넙디마을 상담소 주변 식당, 포장마차, 이동트럭 등에 상담소를 홍보하는 치간칫솔이 배포됐다. 사진=손가영 기자
▲ 넙디마을 상담소 주변 식당, 포장마차, 이동트럭 등에 상담소를 홍보하는 치간칫솔이 배포됐다. 사진=손가영 기자
▲ 인천공항 1터미널을 경유하는 598번 버스는 퇴근시간대 한 번에 15~20명씩 넙디주민들이 내린다. 노조 활동가가 하차하는 시민들에게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인천공항 1터미널을 경유하는 598번 버스는 퇴근시간대 한 번에 15~20명씩 넙디주민들이 내린다. 노조 활동가가 하차하는 시민들에게 홍보물을 배포하고 있다. 사진=손가영 기자

이날 상담소엔 ‘다시 만나고 싶은 손님’이 다녀갔다. 밤 10시부터 일을 하는 한 23살 호텔노동자가 권리수첩 6권을 직접 챙겨갔다. 그는 ‘하나가 모자라다’며 돌아와 1권을 더 챙겼다. 팀장을 맡은 그는 “팀원들에게 주기 위해서”라며 “전 직장에선 사장님이 노동법을 지키지 않았다. 우리 팀원들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했다. 그는 호텔 하청업체 직원이었다.

넙디상담소는 저임금·비정규직으로 점철된 공항지역 청년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과 노조할 권리를 얘기하기 위해 시작됐다. 상담소는 오는 25일 10회차를 마지막으로 잠시 중단된다. 한 국장은 “상담소를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많아 인근 사무실을 빌려 아예 상주 상담소를 여는 것도 논의 중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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