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이상된 프로그램이니 10명을 갈아치웠겠지.” 한전KDN 전산직 파견노동자 박현수씨(가명) 일자리는 ‘만기 2년’이다. 그의 옆·뒤 자리의 직원 모두가 그랬다. 책상·의자는 그대로, 사람만 꾸준히 교체됐다. 전산업종 파견노동자는 박씨 팀에 50명, 한전KDN 전체엔 390여명이 있다. 용역노동자까지 합하면 506명이다.

506명의 정규직화 꿈은 사라졌다. 한전KDN은 506명 전원이 정규직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IT서비스업을 정규직화하면 ‘중소기업 진흥’법 위반이란 주장이다. 박씨는 “한전KDN은 인력파견업체를 중소기업 진흥 대상으로 본다”며 “구체적 업무내용은 보지도 않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말했다.

편법적 간접고용 관행이 팽배한 대표직군인 IT 노동자가 공공부문 정규직화에서 우후죽순 제외되고 있다. 회사는 전산직은 △민간 고도의 전문직이고 △중소기업 진흥법이 적용되는 업종이라는 논리를 편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공공기관이 상시·지속업무 기준을 무시하고 꼼수를 부린다고 반발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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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자신의 일을 ‘정규직이 밀어버린 일’이라고 했다. “문서작성을 예로 들면 우리가 초안을 작성하면 정규직은 편집하고 오탈자를 검사한다. 파워포인트를 예로 들면 슬라이드쇼 배색을 정규직이 결정하면 아이콘 맞추고, 화살표 돌리고, 폰트 재고 위아래 여백 남기는 걸 우리가 한다.” 박씨 팀은 한전이 쓰는 프로그램 유지·보수를 맡았다. 비정규직 대 정규직은 7대3 정도다.

파견노동자들은 한전의 회계처리 프로그램 유지·보수도 맡고 홈페이지 관리, 전자결재 및 게시판 관리, 사내 PC·인터넷망 관리 등을 맡고 있다. 상시·지속적 업무다. 특히 한전KDN은 한전 등 주요 발전공기업의 전산업무를 맡기 위해 설립됐다. 직원 80% 이상이 전산·통신 직종이다.

한전KDN은 ‘소프트웨어진흥법’을 내세운다. 법무법인 광장 및 화우는 이 법에 따른 업종은 “대기업의 공공소프트웨어 사업참여를 제한한다”며 가이드라인상 정규직 전환예외법률에 해당된다고 자문했다. “공공기관이 일률적으로 정규직화하면 업체 상당수가 직원을 잃고 위기에 빠지며 중소기업 진흥 정책 취지에도 반한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일방적 강행을 막을 노동자가 있을까. 박씨는 “결단코 없다. 논의는 사측에 전적으로 유리하다”고 했다. 비정규직은 고용노동부의 강제성있는 ‘공문’을 기대하며 수차례 전화·민원을 넣지만 소득은 없다. 박씨도 고용노동부, 국민신문고, 청와대 청원, 정당 등을 3개월 넘게 반복해서 찾고 있다.

박씨는 “곳곳의 IT 노동자가 신음하고 있다”고 했다. 당장 확인된 기관만 한국관광공사 81명, 한국마사회 33명, 한국가스공사 85명, 한국원자력연료 및 각 시·도교육청 소속 십수명 등이다. 모두 전산직종은 ‘고도의 전문직’이고 ‘중소기업 진흥 대상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 전산직종 파견노동자가 정규직화 과정에서 전원 제외돼 갈등을 빚고 있는 공공기관.
▲ 전산직종 파견노동자가 정규직화 과정에서 전원 제외 강행돼 갈등을 빚고 있는 공공기관.

이 가운데 한국가스공사만 최근 전향적 결과를 내놨다. 전산직 대다수가 정규직 대상이 됐다. 노사전문가협의회의 전문가 4인은 초·중급 기술자는 전원 정규직 대상으로 인정하고 일부 고급 기술직에 한해 예외라고 양측에 권고했다. 일부 고급 기술직 연봉은 최소 6000~7000만원대로, 초·중급 기술자 3000만원의 2배 이상이다.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직 노조는 “권고안을 수용하자고 미리 약속해 가능했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도 노사 협의로 전산직을 정규직 전환했다. 직종별 특성을 고려해 노사가 협의했고 초·중·고급 기술직으로 나눠 정규직 전환 방식을 직종별로 정했다. 박씨는 “노사가 성실히, 구체적으로 협상한다면 절대 불가능하지 않다. 귀 닫고 노동자 주장을 듣지 않는 회사의 IT 노동자들만 나가 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전KDN 관계자는 이와 관련 21일 “전산직종 제외는 회사가 낸 안으로, 노사전협의회에서 논의 중인 사안이지 확정된 게 아니”라며 “노측 대표 4명, 사측 대표 4명, 전문가 3명이 성실히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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