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산병원에서 근무했던 고(故) 박선욱 간호사가 직장 내 괴롭힘 등에 시달리다 지난 2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7개월이 지났지만 병원은 지금껏 유족에게 공식 사과조차 없었다.

17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병원업종의 직장 내 괴롭힘 근절 방안 국회토론회’에선 서울아산병원의 직장 내 괴롭힘 방치로 박선욱 간호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에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과가 이뤄지도록 정부와 국회가 더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이어졌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박 간호사의 막내이모 A씨는 “노동 현장은 실험실과 달라야 한다. 실험실 쥐에겐 고통을 견디지 못하면 약물을 좀 줄여볼까 생각하는 것처럼 서울아산병원이 했다는 대책은 실험실 쥐에게 약을 줄이는 정도의 발상이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인근 성내천 다리에 ‘태움은 폭력입니다’라고 적힌 박선욱 간호사를 추모하는 리본이 매달려있다. 사진=간호사연대 제공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인근 성내천 다리에 ‘태움은 폭력입니다’라고 적힌 박선욱 간호사를 추모하는 리본이 매달려있다. 사진=간호사연대 제공
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사건 진상규명과 산재인정, 재발방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은 내부 감사팀과 경찰조사에서 박 간호사의 죽음이 병원에서의 태움(직장 내 괴롭힘)이나 과로, 스트레스 등의 문제가 아니라 박 간호사가 ‘예민하고 우울한 성격이었다’고 줄곧 주장했다.

공대위 재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활동가는 이날 토론회에서 “지금까지 확인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 서울아산병원이 박 간호사에게 태움 등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노동자 보호 부재, 초과 노동, 중환자실 근무에 따른 스트레스 등을 방치해 왔다”며 “병원 법무팀은 지금까지 유족과 공대위를 만나기에 적절한 시기가 아닌 것 같다, 나중에 때가 되면 만나겠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재현 활동가는 “서울아산병원은 전혀 자신들 잘못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최근 신규 간호사 면접에서 박 간호사의 죽음과 관련한 비상식적이고 파렴치한 질문을 하고, 야간 근무하는 간호사에게 소음 방지를 이유로 수면양말을 신기는 직장 내 괴롭힘을 가했다”고 지적했다.

최근 경향신문 등 보도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 면접관들이 신입 간호사 면접에서 지원자들에게 “우리 병원 신입 간호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냐”면서 “본인은 어떤 방법으로 버틸 거냐”고 물어 논란이 됐다.

서울아산병원은 ‘간호사의 발소리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수 없다’는 환자의 민원 때문에 간호사들에게 신발이 아닌 수면양말을 신고 일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병원 직원들은 수면양말에 슈커버를 신고 이동하다가 발생할 간호사의 안전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지시라고 반발했다.

앞서 공대위는 서울아산병원을 연장근로와 임금체불 등 근로기준법 위반과 노동자에 대한 안전·보건상 조치 미비로 인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특별근로감독을 요청했다. 공대위는 병원장의 사과와 박 간호사 산재 인정, 재발 방지를 위한 신규 간호사 교육제도 도입(일명 박선욱법)을 위해서도 정부와 국회의 적극 개입을 촉구하고 있다.

지난 7월18일 정부는 ‘직장 등에서의 괴롭힘 근절대책’을 발표하면서 괴롭힘을 “직장 등에서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침해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로서, 신체적·신분적·업무적·언어적·개인적 괴롭힘을 포함한다”고 정의했다.

▲ 지난 2월 익명의 서울아산병원 동료 간호사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인근 성내천 다리에 '故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은 우리 간호사 모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대자보. 사진=간호사연대 제공
▲ 지난 2월 익명의 서울아산병원 동료 간호사가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인근 성내천 다리에 '故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은 우리 간호사 모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게시한 대자보. 사진=간호사연대 제공
정부는 의료분야 대책으로 의사협회와 간호협회 내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간호협회에 대한 간호사들의 신뢰도가 바닥인 상황에서 정부가 현장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는지 의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강경화 한림대 간호학부 교수는 “인권의 문제에서 특수 직종이라고 프로세스가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이해관계가 집합적으로 모인 단체에 맡기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많은 간호사가 신뢰할지 의문”이라며 “당사자가 많이 모인 협회보다 독립된 기관이 맡아서 하면서 특수성 등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관계 전문가를 위촉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간호협회 관계자는 “간호협회내 신고·상담센터 운영은 협회가 감당하기 어렵고 이치에도 맞지 않다고 정부에 제안했고, 대신 협회 차원의 회원통합콜센터를 설치해 상담위주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국회에서는 지난 12일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근로기준법·산업안전보건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다.

‘근로기준법’ 개정안에는 직장 내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업무의 적정 범위를 벗어난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거나 업무 환경을 악화하는 일체의 행위를 못 하도록 했다. 또 직장 내 괴롭힘 발생 시 누구든지 사용자에 신고할 수 있고, 사용자는 그 사실을 인지한 경우 조사를 실시하거나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는 등 적절한 조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산업안전보건법’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에도 직장 내 괴롭힘을 예방하기 위한 정부의 책무를 규정하고, 산재의 범주에 포함해 노동자를 더욱 폭넓게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재현 활동가는 “정부의 이번 대책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예방대책 마련 등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면서도 “다만 이번 대책을 구체화할 수 있는 후속 제도 마련이 늦어지는 점, 솜방망이 처벌 우려와 일하는 사람의 능동적 권리에 대한 고민 부족 등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입법기관인 국회가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이미 발의된 법과 새로 보완해야 할 법안을 검토해 실질화해야 한다”며 “정부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노동자가 죽었음에도 법적, 사회적, 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는 서울아산병원과 같은 사용자에게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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