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며 개혁을 촉구했다.

사법부에 대한 최고 통수권자의 메시지는 자칫 독립성을 침해할 여지가 있어 신중할 수밖에 없다.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대통령의 메시지는 여러 해석을 낳을 수 있다. 위험 요소를 감수하고라도 문 대통령이 사법부를 강도 높게 질타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13일 대법원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지금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하는 매우 엄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면서 “지난 정부 시절의 ‘사법농단’과 ‘재판거래’ 의혹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 지금까지 사법부가 겪어보지 못했던 위기”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사법부의 구성원들 또한 참담하고 아플 것이다. 그러나 온전한 사법 독립을 이루라는 국민의 명령은 국민이 사법부에게 준 개혁의 기회이기도 하다”며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며, 만약 잘못이 있었다면 사법부 스스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성실하게 살아가는 국민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 법이다. 정의를 바라며 호소하는 곳이 법원“이라고 강조하면서 ”법관의 판결에 의해 한 사람의 운명은 물론 공동체의 삶이 결정된다. 3천여 명의 법관 대다수는  공정하고 정의로운 재판을 위해 항상 혼신의 힘을 다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법관 대다수’와 달리 과거 대법원 수뇌부들의 일탈로 인해 시민의 버팀목이 돼 왔던 법원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얘기다.

▲ 9월13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중앙홀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행사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문 대통령, 김명수 대법원장. ⓒ 연합뉴스
▲ 9월13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 서초구 대법원 중앙홀에서 열린 사법부 70주년 행사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진성 헌법재판소장, 문 대통령, 김명수 대법원장. ⓒ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과거 대법원의 개혁 조치에 대해서도 일일이 하나씩 언급했다. 지난 1971년 대법원이 국가배상청구 제한을 위헌이라고 판결한 점, 1988년 2월 소장 판사 430여명이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선언한 점, 1993년 서울중앙지법 민사단독 판사 40여명이 사법부의 자기 반성을 촉구하며 법원 독립성 확보를 요구한 점. 군부독재 시절 잘못된 판결을 재심으로 바로잡은 점 등이다.

문 대통령은 “1천7백만 개의 촛불이 헌법정신을 회복시켰고, 그렇게 회복된 헌법을 통해 국민주권을 지켜내고 있다. 행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저를 포함한 공직자 모두는 국민이 다시 세운 법치주의의 토대 위에 서있다”면서 “저는 촛불정신을 받든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절감하고 있다. 그 무게가 사법부와 입법부라고 다를 리 없다. 우리는 반드시 국민의 염원과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날 법원 내부의 용기가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왔듯이, 이번에도 사법부 스스로 위기를 극복해낼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사법부의 민주화라는 대개혁을 이루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법원의 사법발전위원회와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에 대해서도 “사법개혁이 흔들림 없이 추진되기를 바라는 국민의 뜻에 따라 입법을 통해 사법개혁의 버팀목을 세워주실 것을 기대한다”며 개혁을 촉구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6일 신임 대법관에게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사법부의 일이라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면서 “지금 사법부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대 위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법부의 신뢰 회복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말한 바 있다.

대법원은 “종래 대한민국 법원의 날 기념식이 대법원 본관 1층 대강당에서 열린 것과 달리, 올해 기념식은 사법부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국민이 사법부에 맡긴 헌법적 사명을 되새기고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과거 수많은 판사들의 임명식이 열렸고 지금도 대법관들의 취임식이 열리는 2층 대법정 앞 중앙홀에서 거행”됐다고 강조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한승헌 변호사는 국민훈장 무궁화장(1등급)을 수상했다. 대법원은 한 변호사에 대해 “과거 권위주의 정부시절 수많은 시국사건 변호를 맡는 등 인권변호사로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헌신”했다고 평가했다.

국민훈장 모란장에는 故이영구 판사가 수상했다. 대법원은 “엄혹한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대해 분명한 논리로 무죄판결 선고했다. 1976년 1년 동안 긴급조치 위반사건으로 판결을 선고받은 피고인은 모두 221명인데, 무죄가 선고된 경우는 단 한 명”이었다며 “유신시대 사법부가 정권에 맹종한 것은 아니었음을 밝히며 법관의 독립과 양심이 무엇인지를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이밖에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학 법학과 교수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관한 정책수립과 법의 제‧개정 모색 및 여성운동 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한 연구서를 발간하여 성희롱 문제에 대한 법적, 제도적 해결의 기틀을 마련”했다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대법원장, 헌재소장, 중앙선관위원장, 감사원장, 대법관, 법무부장관, 국회 법사위원장, 국가인권위원장, 양형위원장, 대한변협회장,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등 각계 주요인사와 전직 대법원장, 대법관, 국민대표, 법원 가족들이 참석했다.

‘대한민국 사법부 70주년 기념영상’ 식전 상영, 대법원장 기념사와 국민훈장 ·포장 수여식, 법원종합청사합창단의 기념공연이 진행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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