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로 낙관하더라도 이성으로 비관한다. 성폭력 가해자를 단죄하고, 범인을 방관했던 조직을 바꾸는 일은 거대한 물살을 온 몸으로 밀어 올라가는 일과 같다. 내 피해 사실이 명확하니 세상이 알아줄 거란 믿음은 배신당한다. 미투 운동에 동참하면 주변에서 ‘주관’으로 깊이 공감하지만 법정에선 피해자에게 ‘객관’을 요구한다. 피해자가 입증에 실패하면 온갖 비난을 뒤집어쓴다. ‘거짓말쟁이, 꽃뱀, 무고X…’

강민주 전남CBS PD는 올해 상반기 미투 국면을 거치며 60명 이상의 성폭력 피해자를 직간접으로 돕고 있다. 그는 조력자이자 당사자다. 전남CBS에서 회사 간부에게 성희롱 피해를 입고 조직에서 2차 피해를 당해 지금도 싸우고 있다. 기자·PD들이 취재하다 만난 또 다른 피해자들을 강PD에게 연결한다. 취재하듯 증거를 모았던 강PD는 자신이 했던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돕는다. 징계요청서, 성명서, 항의문, 가처분신청서 등 안 써본 서면이 있나 싶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16일 서울 당산동 한 카페에서 강PD를 만나 그간의 일을 들었다. 강PD는 “모두가 싸울 순 없다”며 “다만 싸울 때 세상이 피해자를 믿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경고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선고 결과를 봐도 알 수 있다. 

안 싸우면 후회가 남을 것 같을 땐 싸워야 한다는 게 강PD의 생각이다.

▲ 강민주 PD가 지난 3월 MBC PD수첩과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PD수첩 화면 갈무리
▲ 강민주 PD가 지난 3월 MBC PD수첩과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PD수첩 화면 갈무리

그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1심 선고 결과를 어떻게 볼까. “집행유예 정도를 예상했죠.” 법원 선고에 대한 비판은 생략했다. “무죄가 나오고 기자들이 비슷한 사례 찾아달라고 요청하던데 무죄사례 찾기가 쉽지 않아요. 정말 힘없고 ‘빽’없고 증거 모을 정신도 없는 피해자들은 재판도 못가고 증거불충분으로 수사가 끝나요. 김지은씨는 초반부터 조력자들 여럿이 붙었잖아요. 검찰이 기소해서 재판은 갔죠. 어떤 피해자들은 재판 가는 그 자체도 부러워해요.”

2012~2016년 고용노동부에 진정된 성희롱 피해 2190건 중 검찰이 기소한 건 9건 뿐이다. 나름대로 자료를 들이댔겠지만 수사단계에서 증거로 채택되기도 쉽지 않다. 이런 가운데 김씨의 고소로 검찰은 안 전 지사에게 징역 4년을 구형했다. 징역 3년 이하면 집행유예가 가능하다. 검찰이 재판부에 ‘집유가 아닌 실형을 요청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검찰에서나마 김씨의 주장을 일부 인정했다. ‘징역 4년 구형’, 딱 이 만큼 진보(進步)다.

안 싸우더라도 증거는 모아야

기록은 무기다. 싸울지 말지는 나중 문제다. 강 PD는 피해자들에게 “싸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일단 증거부터 모으라”고 조언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부서가 바뀌거나 해고라도 당하면 동료의 진술하나 받기 어려워진다. 훗날 역으로 고소라도 당하면 방어수단이 없다.

“저는 출근 둘째 날부터 성희롱이 있었어요. 출근 2~3주차부터 주변 법조인에게 조언을 구했죠. 녹취를 해오라고 하는데 처음엔 오랜 시간 고민했어요. 회사 적응하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고. 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내 느낌이 중요해요. 전 한 달에 한번 정도 변호사를 찾아가 증거를 업데이트해 검사 받았어요. 변호사는 부족한 거 알려주고.”

기사도 꼼꼼하게 읽었다. 강 PD는 “앞서 싸운 분들의 선례를 기사로 보면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삼성전기에서 일하던 중 성희롱을 당해 인권위·법원에 문제제기해 승소한 뒤 로스쿨에 진학한 이은의 변호사, 성희롱을 당한 뒤 대법원까지 가서 가해자 뿐 아니라 회사에도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끌어낸 르노삼성자동차의 한 직원. 이들의 이야기는 실제 다툼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선정성에 집착하는 언론

피해자들이 인터뷰하는 과정은 사건을 객관화하는 방법 중 하나다. 사건을 공론화하고 언론을 통해 가해자 측의 입장을 확인할 수도 있다. 강PD는 피해자가 자신의 사건 타임라인을 스스로 정리하고 증거자료를 관리할 수 있으면 사건 종류나 언론사 사정 등을 고려해 피해자와 언론을 연결한다. 아직 기자를 만나기 부담스러운 이들이 있으면 인터뷰 현장에 강PD가 함께 가기도 한다.

이 과정에도 문제는 있다. 강 PD는 “2~4월경에는 여러 매체에서 연락 와서 ‘더 센 거 없냐’ ‘내일 방송 나가야 하는데 더 빨리 해줄 거 없냐’고 했다”고 말했다. 정치인 등 유명인의 성범죄 의혹 보도가 이어지자 시청률 경쟁에서 밀린 매체들이 다급해졌다.

▲ 지난 3월8일 여성의날 서울 광화문 여성노동자대회에서 미투 배지.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3월8일 여성의날 서울 광화문 여성노동자대회에서 미투 배지. 사진=이치열 기자

피해자는 사건을 떠올리는 게 힘들다. 강PD는 “녹취를 풀면 한 일주일은 드러누워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일부 언론인은 이를 반복해서 말하게 한다. “노골적인 답변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을 말만 바꿔서 여러 번 물어봐요. 방송사는 몇 초짜리 멘트를 잘라서 사용해야 하니까 깔끔하게 안 나오면 멘트를 주문하죠. 보통 피해자들은 언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까 시키는 대로 해요. 나중에 와서 후회하기도 하고. 그냥 기자멘트로 처리해도 될 텐데…”

성범죄는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일상에서 수시로 벌어졌기에 사건의 양상이 복잡하다. 강PD는 기자들에게 피해자들이 정리한 자료를 미리 보내도록 조언한다. 기자에겐 취재 편의를 위해, 피해자에겐 취재과정에서 덜 힘들게 하기 위해서다. 이때 기자가 사건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피해자들은 이미 답한 내용을 다시 질문 받는 고통을 겪는다. “힘들게 자료정리해서 보냈는데 하나도 안 읽고 오는 거예요.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죠.”

언론은 피해자를 약자 취급한다. “인터뷰에 몰입하다보면 울기도 하죠. 그러면 그런 모습을 꼭 방송에 내보내려 해요. 격앙됐거나 부르르 떨거나 처량하고 연약한 모습. 왜 피해자들이 그런 모습으로만 보여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됩니다.” 강PD는 방송사와 인터뷰할 때 항상 “당당한 모습, 예쁜 모습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을 만나며 사건을 듣고 곱씹는 건 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왜 연대하는 걸까. 강PD는 한 범죄심리학 교수가 해준 말을 전했다. “교수님이 ‘강PD가 다른 피해자를 도우면서 스스로 트라우마, 마음의 응어리를 치유하는 중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공감이 갔어요. 다른 사례를 접하지 않았다면 제 사건을 객관화하기 힘들었을 것 같아요.”

가해자는 권력자다

다양한 사건을 접하다보니 패턴이 보였다. 예를 들어 강PD는 대학 내 성범죄에선 ‘인권센터’ ‘성평등센터’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센터장이 교수다. 동료교수가 가해자고, 센터 직원은 비정규직이다. 문제를 학교 밖으로 끌고 나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KBS 같은 곳은 징계시효가 있다. 2년이 지나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 법적 판단을 받아 오라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다간 사내에서 징계조차 못한다.

원래 가해자에게 유리한 싸움이었다. “가해자들은 보통 돈과 시간, 명예가 있는 권력자죠. 어떻게든, 돈을 얼마를 주고라도 이기려고 해요. 성범죄 가해자들 소송 맡으면서 성장한 로펌들이 있어요. 가해자들은 미투 운동 국면이 지나가길 기다리면서 이런 곳에서 상담을 하겠죠. 그때부턴 피해자와 가해자의 싸움이 아니에요. 한 개인과 대형로펌의 싸움이죠.” 로펌은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죄를 무죄로 만들 스토리를 짜 준다.

강PD가 접한 사건을 보면 가해자들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일단 끝까지 아니라고 해요. 물증이 나오면 빠져나갈 구멍을 찾죠. 성희롱까진 인정하는데 추행은 인정 안 해요.(성추행부터가 형법상 범죄다.) 그다음에 두루뭉술하게 사과문을 내요.” 사과문에는 구체적인 행위를 다 적고 각각 후속조치를 약속해야 한다. 여기에 공증까지 받으면 법적효력이 있는 사과문이다. 보통은 ‘많은 사람에게 심려를 끼쳐 유감이다’ 정도의 입장을 내놓는다.

강PD는 “피해자들은 문제를 키우고 싶어하지 않죠. (가해자의) 배우자까지 와서 무릎을 꿇었으니 그냥 넘어갔는데 몇 년 뒤 역고소를 당하기도 해요”라며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무고, 협박 등 3~4개는 기본”이라고 말했다. 변호사 입장에선 소를 여러 개 제기해 수임료를 올리고, 의뢰인 입장에선 시간을 벌면서 피해자를 압박할 수 있다. 조용히 사과를 받더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이유다.

▲ 지난 2월 JTBC와 인터뷰하는 강민주 PD. 사진=JTBC 화면 갈무리
▲ 지난 2월 JTBC와 인터뷰하는 강민주 PD. 사진=JTBC 화면 갈무리

각자의 자리에서…

종종 강PD에게 로스쿨 진학을 권유하는 사람이 있다. 노동운동하는 심정으로 돈 안 되는 노동 분야에 뛰어든 ‘아재’ 변호사들과 남녀고용평등법의 중요성을 깨달은 젊은 변호사들, 둘 다 피해자를 온전히 대리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은 한다. 그럼에도 그는 법조인이 될 생각이 없다. 이은의 변호사처럼 성범죄를 주로 다루는 법률대리인이 있다면 지금의 자신처럼 언론계에 머물며 피해자와 법조인과 언론인을 연결해주는 사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강PD도 이제는 “여러 사건을 ‘기획’하고 해결하다 보니 회사에 복귀해서도 좋은 PD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세 시간 가까이 한국사회의 부조리, 언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피해자를 돕는 내 또래의 똑똑한 언론인,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하는 사회인이 많은 걸 처음 느꼈다”고 말했다. 성희롱·2차 피해 이후에도 회사로 돌아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선례를 남기는 게 그의 꿈이다. 아직 한국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미투를 지지한 모든 생존자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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