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냉전 보수파는 북한을 제재하고 압박하는 것만이 북한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박근혜의 ‘통일 대박론’을 떠받든 이들은 북·미 정상회담이 진행 중인 지금도 “이제 남은 것은 대북 제재”(조선일보 2018년 6월13일자 사설)라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겠다는 북한을 여전히 타협할 수 없는 ‘악’으로 규정한다.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지난해 12월 펴낸 책 ‘햇볕 장마당 법치’를 보면, 북한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건 ‘법치’(法治)다. 북한이 국가로서 인민 삶을 책임질 수 없는 상태에서 인민 스스로 ‘장마당’이라는 시장을 발전시켰고 ‘밑으로부터의 변화’에 따라 북한이 ‘소유권 보장’을 묵인하거나 일부 인정하는 식으로 시장경제로의 변화가 현실이 됐다는 것.

이 기자는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시장경제 핵심인 회계 및 측량, 토지이용권, 행정소송법 등 각종 법제도를 익혔다고 주장한다. 이는 북한 투자에 나선 외국 자본의 예측 가능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시장경제 발전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강화할 것이고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강화는 다시 시장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개성공단이야말로 삐라, USB, 확성기보다 훨씬 효과적인 “한국 선전 매체”였고 개성공단에서 일한 한국인 하나하나가 “인간 삐라”이자 “인간 확성기”였다는 것이다.

서울 중구 중림로 시사IN 사무실 인근에서 만난 이 기자는 향후 남·북 경협과 관련해 “과거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개성공단에서 입법·행정 업무를 시행한 한국 측 대표기구)는 세금, 회계, 분쟁, 세무 등과 관련해 세부 준칙을 만들었고 그런 법규들에 의해 개성공단이 규율돼 왔다”며 “개성공단 관리위원회가 축적한 암묵지(암묵적 지식)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남북 경협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아래는 이 기자와 일문일답.

▲ ‘햇볕 장마당 법치’를 펴낸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19일 오후 서울 중구 중림로 시사IN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햇볕 장마당 법치’를 펴낸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19일 오후 서울 중구 중림로 시사IN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책을 쓴 배경은.

“‘종북몰이’에 문제의식이 있었다. 이른바 한국 극우 세력들은 민주·진보 세력이 북을 추종한다고 전제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북한의 국민총생산(GDP)은 한국의 2%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고 독재 국가이며, 매력이 없는 나라다. 예전에 급진 세력이 그런 나라를 동경한 적은 있지만 현재 민주·진보 세력이 이를 추종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박근혜 시절 횡행한 이런 생각이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너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취재를 통해 대북 사업을 했던 분들을 조금씩 알게 됐는데 현재 북한 상황을 전할 수 있는 대중 서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쓰게 됐다.”

- 책의 요지를 ‘경제 발전에 따른 법치주의 강화, 법치에 의한 경제 발전 선순환’으로 봤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이 습득한 제도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경제 발전과 성장에 따라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것이 보편 원칙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가장 기본적인 것은 ‘소유권 보장’이다. 이미 북한 내륙에선 비합법적으로 이른바 ‘돈주’(편집자주-최근 북한 경제에서 민간 자본가 역할을 수행하며 경제를 견인하고 있는 계층을 뜻하는 말)들의 소유권이 암묵적 용인되고 있다. 또 북한 땅을 특정 개인(기업)에게 장기간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부동산관리법’이 2009년 제정되기도 했다. 이 법은 일반 인민에까지 사용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자체 측량이 미비라는 점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개성공단에선 한국 기업가들에게 북한 땅 사용권을 50년씩 인정한 바 있다. 이 사용권을 팔거나 빌려주는 것도 가능했다.”

- 북한의 시장경제는 어느 수준인가.

“현재 북한 전역에 종합시장이 500여개 수준이라고 한다. 사실 장마당은 ‘암시장’ 격인데 2000년대 초 합법화됐다. 북한 당국이 북한 전역에 종합시장이라는 명목으로 합법 ‘소비재 거래소’를 만들었다. 2010년대 전까진 종합시장을 탄압하기도 했지만 북한 스스로 물자를 공급할 능력이 못돼 물자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암시장 가격은 폭등하곤 했다. 2010년대 들어와선 종합시장이 완승을 거둔 것이다.”

▲ 햇볕 장마당 법치/저자 이종태/개마고원/2017년 12월.
▲ 햇볕 장마당 법치/저자 이종태/개마고원/2017년 12월.
- 중국과 달리 북한 변화를 ‘밑으로부터 발전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라고 썼다. 어떤 의미인가.

“중국은 덩샤오핑이 개혁(시장화)·개방(해외자본 투자)을 의도적으로 추진했다. 외국 자본 투자 중심의 경제 성장 전략이었다. 이 경우 소유권을 보장하지 않는 나라에 외국 자본이 들어올 수 있겠나. 소유권은 인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외국 자본과의 사업상 분쟁이 발생했을 때 이를 해결하려면 민법도 필요하다. 중국에선 국가가 주도해 시장경제를 도입한 데 반해 북한에선 식량을 포함한 생필품을 마련하려 인민 스스로 몸부림친 결과 시장이 발전했다. 이미 암암리에 정부 기관과 협력하고 있는 비공식 시장 영역이 비대하다. 앞으로 북한은 이미 형성된 시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 책이 나온 시점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지기 전이다. 책에 “한국이나 미국이 크고 작은 경제적 보상을 제공한다고 해서 북한이 핵을 폐기하지는 않는다”고 단언했는데?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나도 그 생각 많이 했다. ‘내가 잘못 쓴 게 아닐까’하고.(웃음) 지금도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북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은 핵 말곤 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책을 쓸 당시 북핵 문제는 일단 동결로 붙들고 경제성장과 경제 발전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민주주의 제도와 인권 보장 개선을 통해 스스로 자기 체제에 정당성을 갖게 하면 북핵 문제도 풀리지 않을까 전망했다. 이 건 자체가 장기적 문제이다. 그러나 다들 봤겠지만 세상에는 논리를 뒤엎는 일이 펼쳐지곤 한다.(웃음) 책 결론이 틀렸다는 말은 듣겠지만 어쨌든 대화와 교류는 남과 북에 이로운 일이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지난 12일 싱가포르의 센토사섬에서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다. ⓒ 연합뉴스
▲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지난 12일 싱가포르의 센토사섬에서 역사적인 첫 북미정상회담을 가졌다. ⓒ 연합뉴스
- 여전히 보수·극우 세력은 북한 교류를 적대시한다.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고 마오쩌둥 공산당 주석을 만났다. 이후 미국과 중국은 수교를 맺었다. 사실 ‘악마 같은 짓’은 마오가 (북한 권력보다) 더 했다. 국가 간 교류는 달리 볼 문제라는 것이다. 당시 서방은 미중 교류를 반겼다. 중국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면서 민주주의와 인권 영역에 발전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언론이나 민주주의, 인권을 탄압하고 있지만.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아무리 북한 정권에 문제가 많더라도 교류 시도는 중요하다.”

- 경제 발전에 총력을 쏟겠다는 김정은에 진정성이 있다고 보나.

“지난 4월 김정은이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총력을 쏟겠다고 했다. 중국도 베트남도 ‘사회주의’를 붙이고 시장경제를 말하곤 했다.(웃음)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현재로선 김정은이 경제 건설을 위해 핵을 크게 후퇴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진지한 것 같다. 김정은 입장에선 해외 부문이 북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북 정권에 대한 신뢰를 강직하게 심어줘야 한다. 그게 없다면 경제 제재가 풀리더라도 ‘해외 돈’이 북한에 들어오기 어렵다. 북한은 경제 발전을 위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가 절실하다. 북한과 같은 폐쇄 경제에서 경제가 발전하려면 외국 자본이 들어오는 것 말곤 없다. 자국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고, 전쟁이 아니라 평화와 경제 발전을 추구한다는 방침을 세계에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 경협 관련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개성공단 재개인가.

“개성공단 재개에 더해 철도와 가스관 연결 등 인프라 사업도 중요할 것이다. 경제 수익 타산을 따져봐야 할 것이고 각 국의 컨소시엄 구성 등 절차는 복잡할 것이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경제 제재가 해제되면 단기적으로 개성공단, 나선특구,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 등에 외자 유치가 이뤄지지 않을까 싶다. 북한은 외국 자본 유치가 시급할 텐데 시장경제 실험을 할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체제는 내륙으로 시장경제를 확장하고자 할 것이다. 특구 초기에는 섬유, 의류, 전자조립 등 경공업 중심이겠지만 산업 고도화가 요구될 것이다. 남미 국가 등의 사례에 비춰봤을 때 외국 자본으로 성장한 산업이 전후방 효과가 나지 않은 채 고도화하지 못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이 측면에서 한국이 북한에 지적 지원 혹은 자원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햇볕 장마당 법치’를 펴낸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19일 오후 서울 중구 중림로 시사IN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햇볕 장마당 법치’를 펴낸 이종태 시사IN 기자가 19일 오후 서울 중구 중림로 시사IN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경제성장과 독재 체제는 상충되지 않나.

“‘공산당 1당 독재 체제 하에서 시장경제 발전이 가능한가’에 대해 누구도 결론 내지 못했다. 중국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어떤 길로 갈지 사실 추정도 어렵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 입장에서 적어도 10~15년, 즉 단기적으로 현 북한 체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시장경제 발전의 좋은 점만 이야기했지만 경제성장은 사회적 고통을 수반한다. 개인 자유가 신장되지만 노동을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어려움도 있다. 인간관계도 달라지고. 북한은 이 과정을 겪고 있을 것이다.”

- 남북 경협에 나서게 될 경제주체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과거 개성공단 관리위원회가 축적한 경험을 활용해야 한다. 개성공단 관리위원회는 세금, 회계, 분쟁, 세무 등과 관련해 세부 준칙을 만들었다. 그런 법규들에 의해 개성공단이 규율됐다. 위원회가 축적한 암묵지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남북 경협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기술 발전에서 입이나 글로 전달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머리와 몸에 축적된 암묵지다. 현 정부가 이 점을 명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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