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차례가 아닌데 외람되게 왕위를 이어받았고, 재주와 덕이 없는데도 옛 정치를 변개한 것이 매우 많았다. 군적(軍籍)의 정비, 호패법 실시, 사민(徙民) 정책, 경국대전 편찬 등의 일을 모두 한 때 거행하였고, 변방의 군사를 일으키는 일도 끊임이 없었다. 이 모두 백성들의 원망과 한탄이 되었다. 민심이 고요하지 않았는데 천심이 어찌 편안했으랴.

요즘 내가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일은 진실로 불가한 것인 줄 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병이 이미 5,6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 내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 내 병이 낫는다면 비록 하루라도 편안하게 노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마음먹고 결정해서 반드시 전위하려고 했는데 경들이 대의(大義)를 근거로 계속 반대하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중지했었다. 내 할 말은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부끄러워 숨을 곳이 없다.”

이 말은 악성 피부종양에 시달리던 세조가 1468년(세조 14년) 7월22일 자신에게 문병 온 신숙주·한명회·정인지 등에게 자신의 과거 악행을 토로하며 참회한 말이다. 세조는 이 말을 한 뒤 2달도 지나는 않은 9월8일 춘추 52세로 승하했다. 왕위를 찬탈한지 겨우 14년 밖에 안 된 때였다.

세조의 악행은 무엇이었기에 왕으로서 신하들 앞에 부끄러워 숨을 곳이 없다고까지 말했는가. 세조는 수양대군이었던 시절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과 함께 단종을 보호하던 만고의 충신 김종서와 황보인을 때려죽인 다음, 문종의 맏아들로 정당하게 왕이 된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게다가 단종을 보호하던 자신의 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아버지 세종의 후궁과 이복동생들까지 죽였다.

▲ 세조의 릉인 광릉에 세워진 무인석이다. 치켜올라간 눈매 오똑한 콧날, 앙다문 입술의 형상은 매우 사실적인 모습으로 상당한 조각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욕심 가득한 수양대군의 모습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다.
▲ 세조의 릉인 광릉에 세워진 무인석이다. 치켜올라간 눈매 오똑한 콧날, 앙다문 입술의 형상은 매우 사실적인 모습으로 상당한 조각수준을 보여준다. 하지만 욕심 가득한 수양대군의 모습을 보는것 같은 느낌이다.
반발이 없지는 않았다. 바로 사육신이다. 성삼문을 중심으로 하는 사육신은 수양대군 부자를 제거하려 했지만 자신들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한명회에 의해서 저지당했고, 단종의 복위 시도마저 김질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그 결과 성리학적 이상사회 구현을 위해 세종이 집현전에서 길러놓은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이 모두 30대의 젊은 나이로 사지가 찢겨지는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수양대군은 자신의 형수이자 단종의 어머니였던 현덕왕후 권씨의 능(陵)을 파헤쳐 그 관곽을 안산의 바닷가에 내다 버렸다. 정치적 탄압뿐만 아니라 패륜까지 저지른 참으로 잔인한 짓이었다. 이제 그 끝은 단종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웃 명나라에서 상황(上皇) 영종(英宗)이 복위되었다는 소식이 급보로 전해지자 불안을 느낀 수양대군 일파는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가고 말았다. 그렇게 세종의 장손자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했다.

찬탈 세력은 자신들이 영원토록 집권하기 위해 수차례 옥사와 사화를 일으켜 올곧은 선비들을 무조건 역적으로 몰아 죽여 나갔다. 정당성이 없는 권력이었던 만큼 반대세력을 철저하고 잔인하게 제거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뿐. 산적해 가는 국정 현안에 대해 그 어떤 해결책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드러냈다. 결국 그들은 국정운영의 밑바탕이 되는 철학이나 이념이 없었기 때문에 원칙과 명분 없이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만을 위한 정적의 제거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던 사림파는 찬탈 세력의 무능과 달리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부정과 비리로 얼룩진 찬탈 세력에 비해 도덕적으로도 우위에 있으면서 수양대군 일파가 저지른 만행을 비판하며 원칙과 명분을 바로 세워 나갔다. 때문에 민심은 물론이고 기득권 안에서조차 사림파에 동조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이어받아 국정 현안에 대한 결정이 임금과 함께 만천하의 공개적인 자리에서 격렬한 토론을 통해 결정되는 사림정치가 시작되었다. 소수 외척이 국정을 좌우하면서 반대 세력에 대한 살육을 동반하는 탄압이 이루어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정치형태가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국의 주도 세력이 바뀐 뒤 찬탈 세력의 후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죽는 1565년(명종 20년)까지 약 1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권력을 유지했고, 왕실을 장악했다. 그러나 사림정치의 시작과 함께 찬탈 세력의 핵심이었던 신숙주·한명회·권람 등의 후예들은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정치 일선에 나설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사돈관계도 맺지 못했다. 법으로 막은 것이 아니다. 원칙과 명분이 바로 선 이상 찬탈 세력의 후예들로서 정치의 주도 세력이 되는 것이 용납되지 못하는 분위기였고, 그들 스스로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
▲ 신채용 간송미술관 연구원
친일과 독재정권에 협력했던 세력의 후예들은 일말의 양심도 없이 기득권을 유지해 오고 있다. 허나 역사에 비추어 두고 볼 일이다.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지 올해로 만108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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