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동맹은 한국 보수가 숭앙해온 가치다. 남북 관계에 훈풍이 일면 으레 국가 안보를 운운하며 혈맹이 흔들린다고 선동했다. 선거 때마다 반공주의를 자극해 보수 진영을 결집하고 득을 봤던 집단은 조선일보를 위시한 냉전 보수파였다.

시민들은 냉전 보수파 상징, 전직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전 보수 정부와 달리 남북관계 개선에 주력했고 남북 정상회담을 이뤄냈다. 오는 12일에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나올 비핵화 성과는 반공 극우주의에 기생한 냉전 보수파에는 최대 위기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호전성을 부풀리고, 한국 정부 실수라면 침소봉대를 마다하지 않던 조선일보는 어느 때보다 초라하다.

동아일보가 남북 정상회담 성과를 “北 ‘완전한 비핵화’ 새 역사, 이제 첫 페이지 썼다”(지난 4월28일 사설)라고 평할 때 조선일보는 같은 날 1면에서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운만 뗐다”를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운은 뗐다”로 수정·발행하며 혼선을 빚었다.

▲ 2018년 6월4일자 조중식 조선일보 국제부장 칼럼.
▲ 2018년 6월4일자 조중식 조선일보 국제부장 칼럼.
급기야 미국을 들이받은 칼럼도 나왔다. 조중식 조선일보 국제부장은 지난 4일 “미국, 때론 우리를 배신했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그는 1905년 가쓰라-태프트부터 시작해 한국 현대사에서 미국이 한국을 배신한 사례를 나열한 뒤 “트럼프·김정은 회담에서 한국을 위협하는 북핵은 그대로 남겨두고 미국을 위협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장착 핵무기만 제거하는, 우리로선 최악의 거래가 이뤄질지 모른다는 의심은 괜한 것이 아니”라며 “그런 합의로 트럼프는 노벨 평화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칼럼은 트럼프도 “배신의 노벨상”을 받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이에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외교도 장사로 여기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간 호언장담하던 북핵 폐기는 간데없고 한국의 친북 좌파 정권이 원하는 대로 한국에서 손을 떼겠다는 신호”라고 칼럼에 호응했다. 그러나 포털 사이트에는 “조선일보가 반미하고 있다”며 비꼬는 댓글이 적지 않았다.

트럼프 교체를 바라는 칼럼도 있다.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5일자 지면에 “미국과의 관계에서 시험대에 오를 문 정권의 외교·안보 노선은 많은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라며 “‘평화’와 ‘남북 화해’의 무지개가 걷힌 뒤 다가올 엄혹한 현실은 보수 야당에 좋은 기회일 수 있다”고 썼다. 보수의 비전과 전략 재정립보다 문재인 정부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을 기대했다.

그러면서 “그 사이 미국 역시 트럼프 이후의 새 리더십을 모색할 것”이라며 “우리 총선과 같은 해에 열리는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한국 정치 지평에 새로운 요소를 제공할 것이다. 아마도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좀 더 예측 가능한 새 백악관이 조성될 것으로 전망될 때 2020 총선은 야당에도 긍정적 변수를 안겨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조선일보 딜레마는 곧 냉전 보수파의 딜레마다.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논조의 칼럼(양상훈 조선일보 주필)은 자유한국당을 분노케 했다. 이어진 칼럼 논조는 앞서 언급한대로 짐짓 미국에 성을 내거나 트럼프와 미국을 분리해 정신승리를 하는 식이었다. “매번 한국 우파 세력에 불리한 이야기를 하니까, 트럼프 대통령의 정직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의 속내가 더 솔직하다.

조선일보가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이계성 한국일보 논설고문·한반도평화연구소장은 지난 5일 칼럼에서 조선일보 논조를 문제 삼아 양상훈 주필 파면을 요구한 강효상 한국당 의원을 비판하면서도 “분명한 건 한반도 냉전 구도 해체와 평화 정착 쪽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제 조선일보도 이런 변화의 흐름을 진지하게 바라봐야 할 때가 아닐까”라고 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지난달 16일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 개회사에서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내고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물꼬를 트게 된 데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노력이 컸다. 북한이 정상국가로 변화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면 대한민국도 북한에 전폭적인 지원과 협력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 논조와 사주 생각이 다른 까닭은 조선일보에서 ‘경영과 편집의 독립’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방증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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