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과 봄, KBS와 MBC는 불공정 보도로 망가진 과거를 사죄하며 새 출발을 약속했다. ‘기레기’에 대한 분노는 언론 개혁에 대한 요구로 번졌고 양대 공영방송은 전임 경영진을 몰아내며 ‘정상화’를 약속했다. 잘못된 과거 청산을 위한 진상규명이 선결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정상화 기구 출범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건 이들이 새로운 경영진으로 선출됐다.

MBC가 지난 1월 노사 공동 ‘정상화위원회’ 깃발을 올린 가운데 KBS도 양승동 사장 취임 2개월 만에 진실과 미래위원회(이하 진미위)를 출범시킨다. 두 위원회 모두 전임 경영진 시절 제작 자율성 침해와 불공정 보도, 부당노동행위 진상을 밝혀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조직 구성과 조사 범위 등은 다소 차이가 있다.

KBS 이사회는 5일 임시 이사회에서 진미위 출범 근거인 운영규정안을 의결했다. 진미위는 앞서 불공정 보도와 비정규직·외주제작사, 사내 성폭력 문제 등을 다루는 3개 소위로 구성될 예정이었지만 이사회 검토 과정에서 기능이 축소됐다. 진미위는 향후 10개월 동안 과거 KBS에서 벌어진 △방송 공정성·독립성 침해 △부당인사·부당노동행위·부정청탁 사례 등에 대한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 대책을 추진하게 된다. 활동 기간은 1회 6개월에 한해 연장이 가능하다.

MBC 정상화위와 가장 큰 차이는 노사 공동 기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KBS 진미위는 부사장인 정필모 위원장을 비롯한 10인 이하 내·외부 인사로 구성된다. 실제 출범할 위원회는 3명의 KBS 본부장급 인사, 각계 외부 전문가 3인 등 총 7명의 위원이 위촉될 전망이다. 실무를 담당하는 진실과미래추진단은 국장급 단장 1인, 부장급 부단장과 15인 이내 조사역으로 꾸려진다. 복진선 단장 내정자 등에 대한 인사는 7일 전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일로 전망됐던 진미위 출범이 예상보다 늦어진 배경에는 KBS 소수 이사들과 감사실 반발이 있었다. 기존 감사실이 있는데도 진미위를 설치하는 것은 중복 감사 금지와 감사 독립성 보장을 명시한 공공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이라는 주장이다. 김상근 KBS 이사장은 반대 목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로 운영규정 의결을 두 차례 연기했다. 이에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이경호·새노조)는 진미위에 대한 반발을 ‘발목 잡기’로 규정하며 “더 이상 머뭇거리고 눈치 보지 말라”고 비판했다.

정필모 부사장은 미디어오늘에 “공공감사법은 상시 감사 기구에 해당되므로 한시 기구인 진미위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며 “외부 법률 자문 결과 감사의 ‘독립성’이 ‘독점성’과는 다르다는 의견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사회가 운영 규정 의결을 연기한 일은 필요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오랜 논의만큼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입장이다.

진미위는 사건 관련자가 조사를 요구하거나 추진단 예비조사를 거친 안건 중 위원회 재적 과반 출석과 과반 동의를 통해 조사 안건을 결정한다. 조사 과정에서 KBS에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으며 관계자 출석 및 답변 등 필요 조치와 허위 진술, 자료 은폐, 조사 불응, 비밀 준수 의무 위반 등에 대한 징계도 요구할 수 있다. 보고서가 의결된 사안에 대해서는 관련자 징계 등 인사 조치, 범죄 혐의 인정 사항 고발, 피해 구제 조치를 권고할 수 있다.

▲ 서울 여의도 KBS 사옥(위)과 서울 상암동 MBC 사옥.
▲ 서울 여의도 KBS 사옥(위)과 서울 상암동 MBC 사옥.

그러나 MBC 정상화위 사례에 비춰볼 때 향후 조사 활동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지난 1월 출범한 MBC 정상화위는 지난달 1차 조사 보고서 외에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조사 대상 기한을 명시하지 않은 KBS 진미위와 달리 MBC 정상화위는 지난 2008년 2월부터 2017년 11월 MBC에서 벌어진 방송 독립성 침해, 부당한 업무 지시·청탁, 사규 위반 행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정상화위는 출범 4개월 만인 지난달 18일 ‘안철수 박사학위 논문 표절 의혹 보도’에 대한 1차 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당시 후보 논문이 표절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던 보도가 단순 실수나 오보가 아닌 사실상 조작이라는 조사 결과였다. 정상화위는 해당 기사를 작성한 기자를 인사위원회에 회부했고, MBC는 지난 11일자로 이를 보도한 기자를 해고했다.

지난달 25일에는 이른바 ‘우병우 지키기’ 보도에 관여한 MBC 기자 3명을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이석수 전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감찰 중이던 2016년 8월, MBC는 이 전 특감과 모 언론사 기자의 통화 내용을 근거로 이 특감이 감찰 내용을 유출했다고 보도했고 이 특감은 정부여당 비판 속에 사퇴했다.

정상화위는 해당 보도와 관련된 기자 3명에 대해 조사를 진행했으나 결정적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우 전 수석 국정농단 방조 혐의를 수사 중인 검찰에 자사 기자들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이는 조사 권한은 있지만 강제력이 없는 정상화위 한계를 시사한다. 정상화위는 대면 조사 등을 거부한 박상후 전 시사제작국 부국장과 김세의 기자를 대기발령 처분했으나 당사자 조사는 여전히 진전 없다. 김 기자가 부친 병환을 이유로 휴직 중인 가운데, 이달 말이면 3개월인 박 전 부국장 대기발령 시효가 끝난다.

이른바 ‘블랙리스트’로 대표되는 MBC 부당노동행위와 기타 사례들은 MBC 감사국에서 감사 및 조치가 이뤄지고 있다. 박영춘 감사 취임 이래 MBC 감사국은 △사내 성폭력 △법인카드 사적 유용 △아나운서·카메라기자 블랙리스트 △부당한 직급 승진 등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관련자 11명이 해고 등 중징계 처분을 받았다.

정상화위 사측 공동위원장인 정형일 MBC 보도본부장은 미디어오늘에 “당사자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속도를 내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끝까지 조사에 불응하면 사규에 준하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정 본부장은 조사 자체는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며 조만간 추가적인 조사 결과가 발표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정 본부장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사안이 있더라도 법적 하자를 살펴보고 학계 자문을 구해야 하기 때문에 발표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MBC 정상화위 활동 기한은 1년으로 필요 시 한 차례 연장할 수 있다. 정상화위 관계자는 “9월이면 상당히 마무리된 사안들이 있을 것”이라며 이후 정상화위 활동 방향을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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