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부산 경성대에서 열린 한국언론학회 학술대회에서 우리 언론학의 현주소를 점검하는 연구가 나왔다. ‘포털 저널리즘 연구의 경로 의존성과 탈맥락성’이라는 이 연구는 새로운 테크놀러지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저널리즘에 대한 언론학의 ‘새로운’ 이론과 방법이 결핍돼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의 책무를 무엇일까. ‘탈신비화’다. 대상을 둘러싼 신비로움을 걷어내는 일이다. 플랫폼, AI 뿐만 아니라 그 어떤 발달된 미래 기술을 분석하더라도 그 목적은 언제나 하나, ‘탈신비화’다.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자꾸만 외부로부터 기술적인 사고를 요청하는 우(愚)를 범한다. 미디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형성되지 않고, 사회의 영향을 받지도 않고, 단순 매개기능을 갖는 독립된 ‘기술’이란 생각, 그것이 대표적인 우(愚)다.

▲ 페이스북(Facebook)
▲ 페이스북(Facebook)
우리는 기술이 송신자-정보-수신자 사이에서 특정 조건만을 충족시키는 객관적 요소라고 여긴다. 가령 페이스북 같은 미디어는 그 자체로 개인 창조물이거나 천재적 능력의 발현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방송커뮤니케이션은 영상과 음향이라는 기술을 사용하기에 (종이)신문 커뮤니케이션과 구별된다고 여긴다. 마찬가지로 디지털미디어·SNS를 디지털신호와 인터넷기술로만 구분하려는 연구는 우(愚)다. 이처럼 우리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을 기술사(史)의 관점에서만 다룬다.

경제 발전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사회적 관계와 미디어 기술의 관련성은 거의 다루지 않는다. 되레 기술이 그 자체로 사회의 방향을 규정하는 고유한 법칙을 갖는 것으로 여긴다. 이렇게 기술은 언론 연구자의 손을 거쳐 ‘탈신비화’ 대신 더욱 ‘신비화’ 된다.

우는 또 있다. ‘매스 미디어의 일방향성(linear)’이라는 언론학의 대전제가 그것이다. 신비화도 이런 신비화가 없다. 커뮤니케이션 참여자가 상호작용 속에서 송신자-수신자가 되는 ‘휴먼’ 커뮤니케이션과 달리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선 송신자/수신자의 위치가 고착된다. 결론은 이렇다. “문제는 기술이다!” 즉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인쇄·송신시설 등 막대한 기술과 부를 갖추어야 가능한데 이는 누구에게나 가질 수 없기에 수용자의 고립과 수동성이라는 문제를 낳는다는 하나마나 한 비판만 늘어놓는다. 이런 비판은 고립과 수동성을 극복하는 대안은 바로 기술이라고 되돌아간다. 비판의 대상인 기술로부터 수용자를 구원하는 길이 새로운 기술, 능동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디지털이라는 이름의 기술이라고 여긴다. 이렇게 기술 디스토피아는 아주 쉽게 기술 유토피아로 둔갑한다. 변한 것은 없다. 기술로 시작해 기술로 마무리 된다.

기존 언론학의 대전제인 일방향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결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산업자본의 미디어 장악이 문제다. 오늘 디지털 융합시대에 찬사를 받는 ‘양방향성’도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신화에 불과하다. 독일 언론학은 여기에 눈이 멀어선 안 된다고 가르친다.

언론학 연구의 출발점은 기술이 아니다. 일방향성, 양방향성, 상호작용성 등과 같은 기술적 개념에서 출발하는 건 많이 말하지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언론학은 정치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법학, 문학, 매체학 등의 복합적 산물이다. 언론학 연구에선 각자의 이론이 상호보완적으로 수행돼야 한다. 각 학문의 결과물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생각이 아니라 과거의 생각을 완성하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운 노동을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된 노동을 의식적으로 완성해 간다” 현대 사회과학의 기틀을 다진 마르크스의 말이다.

언론학회 학술대회는 아주 좋은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다만 기술은 노동의 오랜 축적물이다. 새로운 기술을 사회적 노동의 결과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분석도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해낼 수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