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동 KBS 사장은 지난 2월 사장 후보자 정책설명회에서 “사장을 포함한 임원의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KBS 홈페이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공공성을 담보로 국민 수신료를 재원으로 하고 있는 만큼 예산 운용의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선언이었다.

KBS 경영을 관리·감독하는 KBS 이사회의 투명성도 강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져왔다. 그러나 KBS가 최근 이사회 예산집행내역 및 일부 의사록·속기록을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 항소하면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누구보다도 투명한 운영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이를 개선할 KBS가 여전히 정보공개에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언론인권센터(이사장 류한호)는 11일 ‘KBS 정보공개 행정소송의 의미’를 주제로 한 포럼을 진행했다.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개최된 포럼은 김성순 변호사(언론인권센터 정보공개시민운동본부장)와 허찬행 청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언론인권센터 정책위원)의 발제에 이어 언론·시민단체,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본부장 이경호·새노조) 관계자들의 토론으로 이뤄졌다.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 서울 여의도 KBS 사옥.

서울행정법원 제5부(부장판사 박양준)는 지난달 5일 언론인권센터가 KBS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청구 행정소송 1심에서 KBS 이사회 예산 집행 내역과 일부 비공개 회의 의사록·속기록이 공개돼야 한다고 판결했다. 예산 집행 내역이 공개됨으로써 이사회 업무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거나 이익을 침해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KBS는 약 보름 뒤 항소했다. 당시 김상근 KBS 이사장은 미디어오늘에 “일부 이사들이 항소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김성순 변호사는 이날 포럼에서 “방송법과 정보공개법 취지 상 예산 집행 내역은 전면적으로 공개함이 마땅하다”며 “KBS의 자의적 비공개 결정과 위법이 1심에서 확인된 현재까지도 실질적인 정보는 아직 받아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법원 판례는 예산 집행 내역을 공개할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지난 2008년 대법원은 “KBS는 수신료 등으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사로서 업무추진비 등에 대해 자의적으로 방만한 예산 집행 여지를 차단하고 시민 감시를 보장함으로써 집행의 합법성·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집행증빙을 공개할 필요성이 크다”고 밝혔다.(2008. 10. 23. 선고 2007두1798 판결)

지난 2014년 국회 입법조사처 역시 “KBS가 업무추진비 상세 내역을 공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밝혔다. 정보공개법 시행령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기관장의 업무추진비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야 할 정보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입법조사처에 관련 법률 검토를 의뢰했던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최민희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판례상 ‘개인정보’로 분류되는 주민등록번호, 은행 등 금융기관 계좌번호 등을 제외한 상세 집행 내역을 밝혀야 한다고 해석했다.

KBS 업무추진비 정보의 불투명성은 기타 공사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도로공사, 한국LH주택토지공사, 한국전력공사는 경영공시 홈페이지를 통해 기관장의 업무추진비 사용일자와 사용 장소, 집행대상자 뿐 아니라 예산이 사용된 자리에 참석한 인원 및 목적 등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KBS ‘경영공시’ 홈페이지는 기관장 업무추진비 집행현황 정보로 월별 업무추진비 집행 건수와 집행 금액 만을 밝히고 있다. 집행 내역란이 있긴 하지만 ‘대외 업무협의’로 표기돼 있을 뿐 구체적인 내역은 기재돼 있지 않다.

▲ KBS 이사장 2018년도 업무추진비 사용내역. 사진=KBS 홈페이지 경영공시
▲ KBS 이사장 2018년도 업무추진비 사용내역. 사진=KBS 홈페이지 경영공시
▲ LH한국토지주택공사 경영공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관장 업무추진비 집행내역.
▲ LH한국토지주택공사 경영공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관장 업무추진비 집행내역.
▲ 한국자산관리공사 경영공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관장 업무추진비 집행내역.
▲ 한국자산관리공사 경영공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기관장 업무추진비 집행내역.

허찬행 교수는 “업무추진비 사용 일시와 장소는 굉장히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연휴 기간 집 근처에서 사용한 예산을 누가 정당하다고 보겠느냐”는 것이다. 허 교수는 “KBS 이사회는 국민을 대리해 KBS 경영 관리·감독을 하며 중요 사항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라며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국민에게 상세하게 설명해야 하며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KBS는 그동안 이사회 업무추진비를 공개하면 이사들의 정당한 업무수행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공개하지 않았다. 포럼에 참석한 조성래 KBS 새노조 부본부장은 “이사들의 법인카드 사용 내역이 외부로 유출되면 개인 사생활이 침해 받는다고 주장하는데 개인정보 침해를 받지 않으려면 개인 비용을 쓰면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법인카드를 쓰는 순간 공적 활동 영역이 되기 때문에 이사회가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법원이 정치적 해석을 이유로 KBS 이사회 의사록·속기록 비공개 필요성을 인정한 부분은 아쉽다는 지적이 나왔다. 재판부는 1심 판결문에 “회의 내용이 공개될 경우 (이사들이) 심리적 부담으로 자유로운 토의, 공정한 심의·의결에 방해 받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며 “이사들 발언이 정치적 의미로 재해석됨으로써 이사들이 비난이나 공격에 노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김민정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11명의 이사들이 사장 선임과 임명 제청 등에 대해 발언할 때 심리적 부담이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사는 각 분야 대표성을 고려하게 돼 있다. 자신을 이사로 추천한 정치권 이익이 아니라 대표성을 지녀야 할 분야의 시각, 권한을 위임한 국민 의사를 적절히 반영하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사들이 어떤 절차를 거쳐서 다수 의견을 냈는지 밝힐 필요성도 제기했다. 김 교수는 다수, 소수, 보충, 별개 의견 등을 모두 기록하는 대법원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KBS 이사회 역시 국민에게 이사회 결정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며 “이사들의 개별적인 발언도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정부 KBS 이사회가 공개하지 않은 회의들이야말로 ‘반면교사’를 위해 내용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1심에서 비공개 필요성이 인정된 이사회 안건 내용은 △KBS사장 후보 선출 관련(827·831차) △고대영 당시 KBS 사장 선임에 대한 청와대 개입 의혹에 대한 규명(833차) △특정 기자 인사 발령에 대한 시정(854차)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보도와 관련한 공정보도 촉구 결의(860차) 등이다.

조성래 부본부장은 “2015년 이후 KBS 이사회 비공개가 많아진 시기는 공교롭게도 고대영 사장 선임 방식이 한창 논의되고, 청와대 개입 의혹이 불거졌던 때”라고 짚었다.

포럼 사회를 맡은 김진웅 선문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KBS가 정보공개에 소극적인 현실이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이러한 토론이 지속되길 바란다. KBS 이사회가 스스로 거듭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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