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세상을 떠난 고(故)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씨가 9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앞에 피켓을 들고 섰다. 정권이 바뀌고 사회 분위기가 변화했지만 드라마 제작 현장은 여전히 장시간 저임금 노동이 계속되고 있다.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방송업도 노동시간 단축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최근에도 한빛센터엔 하루 20시간 넘게 노동한다는 제보가 들어오고 있다.

이씨는 아들 뜻을 받아 설립한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 이사장이다. 지난 8일 이 PD 동생 한솔씨가 SBS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 9일은 이 이사장 차례였다. 오는 10일과 11일은 탁종열 한빛센터 소장이 KBS와 CJ E&M 앞에서 1인 시위를 이어간다. 서울 도봉구에서 현직 교사로 근무 중인 이 이사장은 점심시간 1인 시위를 위해 수업을 조정했다. 그가 이날 오간 길은 아들 이 PD가 생전 새벽에 택시를 타고 출퇴근했던 길이다.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9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9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아버지는 “잠 좀 자고 일하자”라고 쓴 피켓을 들고 섰다. 미디어오늘은 이날 1인 시위 직후 이 이사장을 만났다. 이 이사장은 “근로기준법이 개정돼 방송업이 특례업종에서 빠졌다. 노동시간 단축을 준비해야 하지만 여전히 드라마 제작 현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며 “SBS 사례처럼 휴식시간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빛센터가 받은 제보를 보면 오는 12일 첫 방송 예정인 SBS 주말 드라마 ‘시크릿 마더’ 스태프들은 하루 20시간 넘게 일했다. 9일부터 방송 예정인 MBN 수목 드라마 ‘리치맨’ 제작 현장도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tvN 수목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경우 한빛센터가 주요 책임자를 만나 스태프 휴식시간 확보 등을 주문했다. 한빛센터에 따르면 tvN은 ‘3월 이후 무리한 촬영을 하지 않고 종방 이후 포상 휴가 등을 보상하겠다’, ‘일 7시간, 주 1회 휴식 보장’, ‘스태프 추가 충원’ 등을 약속했다. 다만 탁 소장은 “연출부 등에는 휴식시간이 늘었지만 일부 스태프에겐 효과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실제 이 드라마는 결방도 했다. tvN은 지난 2일 “반(半) 사전 제작으로 일찍 촬영을 시작했지만 방송 전 배우 교체로 불가피하게 촬영이 지연됐다. 밤 촬영이 많아 촬영시간에 제약이 있고, 깊은 감정 연기를 위해 배우와 제작진이 공들여 찍다보니 스태프들 피로도가 높아 휴방을 결정했다”고 했다.

탁 소장은 “70분짜리 주2회 드라마 편성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문제”라며 “주1회가 어렵다면 방송 시간을 40분 정도로 단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이사장은 최근 YTN 사태가 최남수 사장 사퇴로 일단락된 만큼 언론노조가 열악한 방송 현장에 신경쓸 때라고 지적했다.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9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9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지난해 하반기부터 한빛센터를 준비했는데 당시는 KBS·MBC 노동조합이 파업할 때였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을 만났는데 그때는 위원장도 한빛센터 문제에 적극 신경 쓸 자신이 없어 보였다. 본격 한빛센터 설립 논의에 들어갈 때 MBC 문제가 해결됐다. 언론노조에서 전담하는 인력을 뒀다. 한솔이(한빛재단 이사·이PD 동생), 탁 소장, 서울시 협조(노동 담당 협력관)까지 더해져 창립할 수 있었다. 언론노조도 방송계의 열악한 노동 환경 문제를 외면했다고 비판 받기도 했는데 이제 이쪽에 관심을 높일 때다.”

이 이사장은 근로기준법 개정처럼 법·제도 마련도 필요하지만, ‘업계 관행’이라며 이어져 온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CJ E&M 관계자를 만났다. 본인도 고민이 많다며 자신들이 선도해 노동 환경을 바꿔보겠다고 하더라. 그렇지만 업계 관행, 타성에 젖은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어렵다. 다른 방송사도 있는데 선도하는 것도 부담되지 않겠나. 드라마를 시간 내 만들어야 한다는 방송계 문화, 내가 잠 좀 덜 자고 좋은 거 만들어야지 하는 열정 페이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 충분히 쉬면서도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는 문화를 만드는 개혁이 필요하다.”

잘못된 관행을 바꾸기 위해선 리더의 생각도 중요하다. 이 이사장은 “상층부가 ‘내가 일할 땐 더 했어’라며 부추기는 건 아닌가 싶다”며 “방송계 전반이 기존 의식을 개혁하지 않으면, 편법이 고쳐지지 않으면, 근로기준법 개정안도 안 지켜지지 않을까”라고 우려했다.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9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은 이 이사장이 든 피켓. 사진=김도연 기자
▲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이 9일 점심시간인 12시부터 1시까지 서울 상암동 MBC 앞에서 열악한 방송계 노동실태 개선을 촉구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은 이 이사장이 든 피켓. 사진=김도연 기자

방송사 내 정규직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탁 소장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스태프 임금을 보니 시급 3900원 수준이었다”며 “스태프 저임금을 기반으로 정규직 고임금이 유지됐다”고 지적했다. 제작 현장을 주도하는 방송사 내 정규직 인력은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몇 개월 휴식을 취하지만 비정규직·프리랜서들은 짧은 휴식 뒤 곧바로 다음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 정규직 CP들이 적극 외주(독립) 인력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밑으로부터 변화도 필요하다. 그는 “처벌만으로는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며 “한빛센터가 네트워크를 형성해 스태프들의 연대 활동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한빛센터 등이 대신 싸우는 건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며 “노조든 협의체든 이들을 조직화하는 게 한빛센터의 중장기적 고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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