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2016년 7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무소속 의원 162명이 발의했던 방송법 개정안 처리를 요구하며 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거부하고 있다. 정작 자신들은 발의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이유를 두고 개정안에 담긴 특별다수제로 KBS와 MBC의 적폐청산을 방해하기 위해서라는 게 중론이다. 특별다수제는 공영방송 사장 선임 시 야당 이사 일부의 동의를 받게 해 여야 합의를 강제하는 제도다.

2016년 개정안은 2017년 초 MBC사장 선임 국면에서 특별다수제로 부적격 인사를 가려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이는 김재철-안광한으로 이어진 MBC사장들의 부당노동행위와 불공정보도 전횡에서 비롯됐다. 당시 MBC내부에선 “김장겸 사장을 막기 위한 원 포인트 법안”이란 이야기도 있었다. 언론계에선 당시 개정안이 ‘김재철 방지법’으로 불렸는데, 한 쪽에선 ‘손석희 방지법’으로도 불렸다.

▲ 2016년 12월21일  언론노조와 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언론장악방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중인 모습. ⓒ언론노조
▲ 2016년 12월21일 언론노조와 언론단체비상시국회의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언론장악방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중인 모습. ⓒ언론노조
법안 발의 이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과 촛불시민혁명이 이어졌고 대통령 탄핵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정치지형은 2016년 7월과 완전히 달라졌다. 언론운동진영은 무색무취의 인사가 사장으로 선임될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 김재철 사장 같은 극단적 인사를 막아내기 위해 내놓았던 ‘수세적’ 법안에서 이제 공영방송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공세적’ 법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는 시민혁명 국면에서 시민들이 공영방송의 정상화에 힘을 실어준 결과였다.

KBS 출신의 최경영 뉴스타파 기자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다시 풀고 시작해야 한다. 공영방송을 기회주의자들의 천국으로 놔둘 수 없다”라고 지적했고 이용마 MBC기자는 “이른바 ‘김재철 방지법’은 여야 모두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 양산법”이라며 즉각 폐기를 주장했다. 공영방송 기자·PD 대부분이 조합원으로 속한 전국언론노조(위원장 김환균) 역시 2017년 11월28일 1년 전 야당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히고 더욱 진보적인 방송법 개정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 2016년 12월16일 이용마 MBC기자를 찾아간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 문 후보는 당시 공영방송 정상화를 약속했다. ⓒ노컷뉴스
▲ 2016년 12월16일 이용마 MBC기자를 찾아간 문재인 당시 대통령 후보. 문 후보는 당시 공영방송 정상화를 약속했다. ⓒ노컷뉴스
대통령도 국민들의 공영방송 정상화 요구에 응답했다. 지난해 8월2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 자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 법안(김재철 방지법)이 통과된다면 어느 쪽으로도 비토(거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사장으로 선임되지 않겠느냐. 온건한 인사가 선임되겠지만 소신 없는 사람이 될 가능성도 있다”라고 밝혔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통위 산하 방송미래발전위원회는 지난 3월29일 △공영방송 이사 중 3분의1을 여야가 아닌 중립지대 이사진으로 구성 △이사진 임기 교차제 및 연임 제한 △이사록 회의록 공개를 통한 운영 투명성 강화를 골자로 한 방송법 개정안을 내놨다. 그러나 방통위 안 역시 정치권이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갖는다는 전제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전국언론노조는 지난 10일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이란 이사회와 사장 등 지배구조 결정을 둘러싼 여야의 지분 싸움이 아니다”라며 “방송법 개정의 올바른 방향은 모든 정당이 이사추천권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통위 안이 공영방송 지배구조개선을 위한 최선의 안이 아니라는 것. 언론노조는 “방송법 개정안은 정치권의 공영방송 이사 추천을 배제하고, 지난 ‘신고리 공론화위원회’의 시민참여단 구성 등의 방법으로 일반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하는 한편, 공영방송의 직능단체, 방송사업자 및 종사자, 각 분야별 시민단체의 추천권을 확대하는 방향이 검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2012년 7월26일 국회에서 KBS카메라 기자가 '방송법 개정' 스티커를 붙인 채 촬영하고 있는 모습. ⓒ이치열 기자
▲ 2012년 7월26일 국회에서 KBS카메라 기자가 '방송법 개정' 스티커를 붙인 채 촬영하고 있는 모습. ⓒ이치열 기자
이와 관련 국회 과학기술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추혜선 정의당 의원 또한 “지금이야말로 정치권이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에 관한 기득권을 내려놓을 때”라고 주장했다. 추 의원은 시민들로 구성된 이사추천국민위원회가 공개면접으로 공영방송 이사를 추천하는 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용마 MBC기자는 국민참여재판의 배심원단을 차용한 국민대리인단의 사장 선임 방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현재로선 ‘추혜선 안’과 ‘이용마 안’이 언론운동진영의 요구와 가장 가깝다.

시민의 손으로 여성·소수자·노동 등 분야별 전문가를 뽑아 공영방송 이사진으로 보내고, 이사진을 적절한 규모로 확대해 특정 인사의 전횡 가능성을 줄이는 한편 이사회 내 비정파적 연합을 유도하고, 이사의 보수 및 특권을 대폭 줄여 공영방송 이사직이 어떤 특권이 아닌 전문성에 따른 사회적 봉사의 기회로 여겨져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일례로 독일 공영방송 ZDF 방송평의회위원들은 무보수 명예직으로 종교·교육·과학·예술·노조 등 각계를 대표하는 60여명으로 구성돼 있다.

올해 8월이면 MBC와 KBS의 이사진 교체시기가 온다. 현재 국회 교섭단체가 4곳으로 늘어나면서 이사 추천권을 둘러싼 여야 갈등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지난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야당의 이사 추천 몫 갈등으로 1년 가까이 ‘개점휴업’ 상태를 겪기도 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는 국회의 구도를 반영하며 정치권이 이사회 추천권을 갖는다’는 지금까지 논의의 전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야말로 촛불시민혁명을 겪은 한국사회가 시작해야 할 공영방송지배구조 개선의 출발점이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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