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된 전 대통령 박근혜씨의 1심 판결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 혐의 일부를 무죄로 판단한 것을 두고 법조계는 “정경유착의 사각지대를 열어줄 수 있다”며 “상급심에서 바로 잡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참여연대 등은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판결 분석과 전망 좌담회’를 열고 1심 판결이 정경유착 폐습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가장 많은 비판이 쏟아진 부분은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의 존재를 부인한 대목이다. 1심 재판부는 “부정한 청탁 대상인 경영권 승계작업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증명돼야 한다”고 밝혔다.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참여연대 등은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판결 분석과 전망 좌담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참여연대 등은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민변 사무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1심 판결 분석과 전망 좌담회’를 열었다. 사진=손가영 기자

김남근 민변 변호사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게 증명돼야 한다’는 재판부 판단을 반박했다. 김 변호사는 단적인 예로 박근혜 전 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실 및 경제수석실이 작성한 문건을 들었다. ‘삼성 리포트’로 불리는 민정수석실 자료엔 “지금이 삼성의 골든타임,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세자 자리 잡아줘야” “우리 경제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이건희의 유고 장기화로 인해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가시화되는 국면 → 경제에 대한 실질적 기여 기회로 활용”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청와대가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울러 박씨의 1심 재판부는 이와 관련 “일반인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 부회장에게 승계작업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지만 형사재판에서는 그렇게 볼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임지봉 서강대 로스쿨 헌법학 교수는 “국민들 상식을 벗어난 재판이 정당화되기 위해선 그 국민적 상식을 뛰어넘는 면밀한 논리가 있어야 한다”며 “면밀하고 엄정한 논리를 이 판결문에선 발견할 수 없었다”고 비판했다.

재판부의 승계작업 인정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승계작업이 미르·K스포츠재단 및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흘러 들어간 삼성그룹 자금 220여억 원을 뇌물로 판단하는 전제이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두 재단과 영재센터에 준 지원금엔 ‘제3자에게 뇌물을 줬다’는 제3자 뇌물공여죄가 적용됐다. 이 경우 뇌물을 준 쪽이 받은 쪽에게 부정한 청탁을 했다는 점이 입증돼야 범죄가 성립한다.

1심 재판부는 “승계작업이 개념적으로 뚜렷하지 않고 피고인이 그에 대해 뚜렷이 인식을 했다고 볼 수 없다”며 220억 원 뇌물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특검 주장은 형법상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지적이다.

최정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형법학 교수는 “명확성의 원칙은, 범죄 구성 요건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지 구성요건을 명확하게 인식하란 뜻이 아니”라며 “승계작업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으면 충분하지 어느 정도 인식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형법 이론에서는 피고인이 ‘내가 하는 것이 범죄다’, ‘청탁을 받고 있다’ 등을 대체로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며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판단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 사진=4월6일 YTN '박근혜 1심 선고' 생중계 영상 캡쳐
▲ 사진=4월6일 YTN '박근혜 1심 선고' 생중계 영상 캡쳐

한국 사법부가 기업형 조직범죄를 소극적으로 처벌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최 교수에 따르면 정경유착 등 기업형 조직범죄는 외형상 합법적인 경우가 많아 고의를 입증하기 대단히 어렵다. 최 교수는 “대통령이 삼성에 대해서 ‘지원’을 했으니 한 문화재단에 지원을 해달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 보면 충분히 합법적”이라면서 “조직범죄의 경우 구체적인 실무자 단계로 내려갈수록 불법행위가 행해진다. 미르재단만 봐도 구체적인 추진 과정은 다 위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의 말은 재판부가 기업의 조직범죄의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조직범죄에서는 실무자들이 최고 결정권자들에게 일부러 보고를 하지 않는 경우도 충분히 있다. 적어도 최고 결정권자는 합법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청탁 인지 여부를) 엄격히 해석하면 다 몰랐다로 결론이 난다”고 비판했다.

헌법적 관점에서 ‘평등주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지적도 있다. 유사한 조건을 두고 삼성그룹의 부정 청탁은 부인하고 롯데·SK그룹의 청탁은 인정하는 건 불평등한 사법 적용이라는 비판이다.

임 교수는 “사실관계는 다 다르지만 롯데는 ‘월드타워 면세점 특허 재취득’이라는 현안과 관련해 묵시적 청탁을 비교적 쉽게 인정했다”면서 “기준 적용의 엄격성에 차이가 존재하지만 판결문을 봐도 삼성과 롯데·SK 그룹을 차별적으로 판단한 합리적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좌담회에 참석한 법조인들은 ‘이 판결이 정경유착 폐습 근절에 자칫 나쁜 선례로 남을지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 변호사는 “권력형 범죄의 경우 재단 등의 기관을 만들어서 뇌물을 바치는 범죄가 많다”며 “이 사건은 재단 자체를 뇌물로 봐야 하는 성격의 범죄라 보여지는데, 재단을 ‘제3자’로 보고 박 전 대통령이 사적으로 취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양형 참작 사유로 판단했다. 권력형 뇌물 범죄 본질을 이해못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임 교수도 “앞으로 다른 재벌 기업들도 경영권 승계 작업이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정경유착 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부정한 청탁 없이 좋은 의도에서 재단에 출연금을 준 것이다’ 해버리면 그때 재판부가 취할 수 있는 스탠스가 굉장히 좁아질 것”이라며 “정경유착 폐습을 끊을 수 있는 엄정한 기준 제시라는 관점에서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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