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보도 이후 미투(MeToo) 본류가 흐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런데 묻고 싶다. 누가 미투를 흐리고 있나. 정봉주 전 의원은 이 사건을 알리바이 공방으로 몰고 가고 있다. 미투 본질을 흐리는 사람이 누군지 꼭 한 번 생각해 달라.”

7년 전 정봉주 전 의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안젤라(가명)씨가 지난 27일 변호인단과 함께 나온 기자회견 질의응답에서 언론에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이다.

안젤라씨는 “내가 정 전 의원에게 바라는 건 공개적인 성추행 인정과 진실한 사과”라며 “진심 어린 사과와 반성을 한다면 정 전 의원이 정치인으로 무얼 하건 내가 관심 가질 일은 없다”고 강조했다.

정 전 의원이 피해자의 증언대로 2011년 12월23일 렉싱턴 호텔에서 자신의 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하고 28일 프레시안 측에 대한 고소를 취하한 후에도 안젤라씨 측 변호인단은 정 전 의원에게 ‘공식적인 진실한 사과’를 요구했다. 변호인단은 “고소 취하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면피성 입장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며 “지금도 안젤라의 주장이 허위라고 생각하면 피해자를 고소하라”고 했다.

▲ 정봉주 전 의원은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나로 인해 마음 상하신 분들, 믿음을 갖고 지켜봤지만 실망하신 분들,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정봉주 전 의원은 28일 페이스북을 통해 “나로 인해 마음 상하신 분들, 믿음을 갖고 지켜봤지만 실망하신 분들,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정 전 의원은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이날 오전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의 입장과 거취를 직접 말하겠다며 오후에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지만 취소했다. 대신 그는 페이스북으로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내 자신의 문제를 미처 보지 못했다. 누구를 탓할 생각도, 원망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나의 불찰이다”며 “나로 인해 마음 상하신 분들, 믿음을 갖고 지켜봤지만 실망하신 분들,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후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만 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끝내 피해자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는 없었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에게 사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최종 입장 정리였을까. 안젤라씨 폭로 이후에도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던 그였다.

그럼 프레시안은 최종 승리자인가. 28일 정 전 의원이 문제의 호텔에서 쓴 카드 내역이 나왔다고 단독 보도한 SBS는 언론으로서 소명을 다한 것일까. 프레시안 보도와 정 전 의원 측 반박 보도자료를 단순 중계도 제대로 못 해 오보를 낸 다른 언론은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언론인들 사이에서도 프레시안과 SBS 등 이번 정봉주 성추행 의혹을 다룬 보도들을 차분히 되짚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기본적으로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에 충실했는지, 언론이 성폭력 의혹 논란과 2차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얼마나 신중히 보도하고 사실 검증에 충실했는지 아쉬운 점이 많았다는 평가다.

“언론은 성범죄를 보도할 때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권을 존중해 보도로 인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해자와 그 가족의 경우에도 그들의 기본권이 부당하게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한국기자협회·국가인권위원회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

“언론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마치 확정된 진실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는 보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언론은 수사기관으로부터 얻은 정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리고 적절한지 판단해 보도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한국기자협회·여성가족부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

성폭력 사건 보도와 관련한 가이드라인에서 일부 발췌한 이 권고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언론이 있을까.

▲ 프레시안은 지난 16일 정봉주 전 의원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고 밝혔다.
▲ 프레시안은 지난 16일 정봉주 전 의원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소한다고 밝혔다.
프레시안 보도는 곱씹어 봐야 할 지점이 있다. 프레시안은 정봉주 성추행 의혹 보도의 핵심 증인으로 굳게 믿었던 ‘민국파’(‘정봉주와 미래권력들’ 전 카페지기)의 인터뷰를 내보낸 후 “민국파의 증언은 누가 국민들을 상대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 자료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결국 프레시안은 민국파의 ‘경로’(을지병원에서 렉싱턴 호텔로 이동)에 대한 진술 외에 정 전 의원 측과 핵심적인 공방을 벌였던 ‘시간’ 관련 증거는 모두 잘못 보도한 셈이 됐다. ‘거짓말’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 자료는 프레시안이 제시한 게 아니라 정 전 의원의 ‘자백’으로 밝혀졌다. 이 역시 어차피 경찰 조사 과정에서 밝혀질 일이었다.

첫 보도 시점과 피해자의 지인인 기자가 직접 기사를 써야 했는지에 대해선 ‘미투’ 보도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독자들의 오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신중함과 해명이 필요했다.  피해자 증언을 재구성하기 위한 팩트를 모으는데 부족한 측면이 있었고, 보도 시점을 조금 늦춰서라도 정황 증거 확보와 반론권 보장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안젤라씨는 서어리 프레시안 기자를 통해 미투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정 전 의원이 밝혔듯이 서 기자는 당시 내 사건을 공유하던 지인이자 2차 가해를 막아줄 신뢰가 있는 기자였다”고 말했다. 프레시안 측도 이번 보도는 피해자와 기자의 신뢰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판단했다고 밝혔다. 피해자의 지인이던 서 기자가 가장 ‘진실’을 잘 보도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존중한 것이다.

프레시안 기자의 지인에 대한 보도가 저널리즘의 원칙을 어겼다면 마찬가지로 정 전 의원 측과 각별한 관계인 김어준씨가 진행하는 SBS ‘블랙하우스’도 정 전 의원의 알리바이 증거만을 뒷받침하는 식의 보도를 내보내지 말았어야 한다. 게다가 SBS는 프레시안이나 피해자 측의 반론권도 보장하지 않았다. 이 모두 ‘가까운’ 취재원에 대한 지나친 믿음에서 비롯된 신뢰성 상실이다.

앞서 정주식 직썰 편집장은 “프레시안의 여러 패착 중 가장 안타까운 모습은 정봉주에게 ‘인정 안 하면 더 깐다?’며 기사로 밀당을 하는 모습”이라며 “프레시안이 정말 제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걱정한다면 그런 밀당을 하지 말고 빠르게 논란을 매듭지어야 한다. 본인들 말처럼 그러는 사이 제보자는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레시안이 지난 12일 민국파씨의 증언을 먼저 공개한다며 “정 전 의원이 이 같은 증언에도 사실관계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추가 내용을 공개할 방침”이라고 한 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후 “프레시안 보도는 나를 서울시장에 당선되지 못하게 하려고 기획된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정 전 의원의 다소 지나친 반박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고소한 것도 적절치 못한 대응이었다는 지적도 일었다.

지난 27일 안젤라씨 측 변호인은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을 수임하면서 제일 걱정은 언론과 접촉이었다. 언론 접촉이 없을 수 없는 사건인데 이 사건을 해야 하는가였다”며 “언론에서도, 사회 일반에서도 ‘과연 이런 식으로 미투 운동을 대응하는 게 옳으냐’ 하는 반성과 담론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이번 정봉주 미투 보도 논란이 남긴 과제. “언론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이 마치 확정된 진실인 것처럼 오인될 수 있는 보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폭력 사건 보도 가이드라인부터 먼저 되새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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