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봄 배우 이매리씨는 SBS 주말 드라마 ‘신기생뎐’에 캐스팅 됐다. “그동안 ‘매리씨 캐릭터’는 보였는데 ‘매리씨는’ 안 보였다. 이젠 매리씨가 보여야 한다.” 이씨가 당시 들었던 말이다. ‘배우 이매리’를 어필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고무’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오고무는 사방에 걸어놓은 다섯 개의 북을 치면서 춤을 추는 고전무용 중 하나다. 이씨는 기생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이마담 역을 맡았다. “오고무는 악보가 없어요. 북치는 것부터 다 외워야 돼요. 무용을 배우라니 사비를 들여 배웠죠. 전공자보다 더 열심히 한 거예요. 두 달 뒤에 타이틀 신(본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소개 영상)을 찍는다고 하니까.” 이씨는 훈련을 강행했다. 타이틀 신은 보통 촬영 직전에 찍는다.

두 달 뒤, 다시 두 달 뒤. 방영이 계속 늦어졌다. 몸에 이상이 왔다. 인대가 손상됐고 어깨 힘줄도 파열됐다. 무릎엔 물이 차 계단 올라가기도 힘들었다. 이씨는 끝까지 참았다. 섭외 10개월 만에 방송이 시작됐고 8개월 간 진행된 드라마를 버텼다. 이후 8년째 재활 치료 중이다. 치료비만 수천만 원. 미디어오늘은 이씨를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나 열악한 드라마 제작 환경을 들었다.

▲ 배우 이매리씨. 사진=이매리 제공
▲ 배우 이매리씨. 사진=이매리 제공

“처음부터 10개월 뒤에 찍는다고 하면 차근차근 배우는데 ‘두 달 뒤’, 다쳐도 또 ‘두 달 뒤’라고 했죠.” 이씨는 당시 ‘부신피질호르몬저하증’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이씨는 “통증 치료 때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데 치료 중에도 연습을 강행하니 스테로이드가 일시적으로 안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이씨가 제작진에게 아프다고 말했더니 돌아온 답은 “그렇게 열심히 할 줄 몰랐다”였다. 촬영 일정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던 제작진은 배우의 부상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이씨는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보통 계약서를 안 써요. 촬영 직전에 혹은 촬영하고 나서 써요.” 문구를 하나하나 따질 현장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계약서에 문제점이 보여도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제작진이 신경써주기 시작하면 한복도 예쁘게 입히고 배경·조명도 화려하게 해주죠. (제작진에게) 예쁘게 보이지 않으면 ‘짤’ 없어요. 몇 회 나올지 알 수도 없고, 촬영하다가 (배역이) 중간에 죽을 수도 있죠.” 이씨에 따르면 제작진 허락 없이는 인터뷰도 할 수 없고, 이미 진행한 인터뷰도 통제되곤 했다. 출연진 간 연락을 못하게 하는 제작진도 많다고 했다. 일부 톱스타를 제외하면 배우 다수는 ‘을’이다.

배우들의 경우 예술인복지재단을 통해 예술인 증명을 하면 산재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다. 이씨는 “대다수 형편이 어려운 배우들은 보험료를 내는 것도 어렵다”며 “법적으로도 배우들 보험을 다 들어줄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산재보험 들고 가면 바로 잘릴 걸요.” 법보다 가까운 건 주먹이다.

배우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방송계

당시 드라마 조연출이 이씨에게 “발설하지 말아 달라”며 “우리 보험이 없다”고 했단다. 배우들에 대한 산재 보험을 보장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 조연출은 최근 ‘인권’ ‘민주’ 등이 들어간 상들을 받았다. 처음엔 이씨도 발설하지 않았다. 재활 치료비는 한 번에 30만원이 넘기도 했다. 그의 최대 고민거리이자 직면한 현실이었다. 그런데 방송계 관계자들은 이씨가 처한 상황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이씨에게 “방송이 원래 그런 거 알잖아요. 홍보나 잘 하고 다니세요”라고 했다.

“다치고 2년쯤 뒤에 업계 관계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런데 다친 얘기를 못하게 하는 거예요. 불편하니까 얘기하지 말라는 거죠. ‘돈 없고 TV에도 안 나오니까 더 잘해야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심지어 이씨에게 로비스트를 제안하거나 해외 사업권을 따달라고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씨가 인도 등 해외 예술인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 2018년 푸네영화제에 참석한 애니메이션 거장 로이(왼쪽)과 니시 타키야. 가운데는 배우 이매리씨. 사진=이매리 제공
▲ 2018년 푸네영화제에 참석한 애니메이션 거장 로이(왼쪽)과 니시 타키야. 가운데는 배우 이매리씨. 사진=이매리 제공

언제부턴가 제작 환경에 대해 문제 제기하는 이씨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씨는 “MBC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 격투기 선수인 효도르가 노 개런티로 출연하도록 섭외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방송계를 무작정 비판하고 싶은 건 아니란 뜻이다. 배우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달라는 뜻이었다.

이씨는 “그런데 한 제작사 관계자는 ‘이제 효도르는 인기가 없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또 다른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런 2·3차 가해들이 더 상처를 줬다”고 했다.

억울함이 밀려왔다. “실비 보험이 안 되니 치료비가 엄청 나와요. 치료를 주저하게 되죠. 8년이면 그동안 종합편성채널도 생기고 한창 일할 땐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제 약점을 가지고 부릴 생각만 해요. 이거 해와라, 저거 해와라. 저보고 힌디어 통역을 완벽하게 하면 일을 주겠다는 방송계 관계자도 있었어요. 말이 되나요?”

방관하는 정부

방송·제작사 등 이해관계 탓에 엄연히 고시된 표준출연계약서 등은 무시되고 있다. 지난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표준출연계약서를 만들었지만 의무가 아닌 권고사항일 뿐이다. 연기자 노조가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면 정부는 “당사자 간 이해관계가 있어 강제할 수 없다”고 답했고 나서지 않는 까닭에 대해 “사회적으로 이슈가 돼야 한다”는 답만 내놨다.

이씨는 “(주요 책임자들에겐) 항상 한류가 먼저였고 선거가 먼저였다. 사드 때문에 드라마 상황이 힘들어진 게 더 중요했다. 그럴 때마다 내 얘기는 나중으로 미뤄졌다”며 “한류만 신경쓰다보니 많은 것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 등이 지난 9일 개최한 국회 토론회에서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으나 그 뒤의 많은 분들이 저임금 고용 불안 등 최악 조건 속에서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며 “드라마 제작 분야가 등한시된 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매리의 근황, 인도·아랍 등과 문화교류

이씨는 카타르월드컵 민간 홍보대사다. 대학 연기영상과에서 3년 정도 강의도 했다. 지난 8년 동안 한류에서 배제된 인도·아랍 예술인들과 교류하며 아픔을 달랬다. 억울한 사연을 얘기했을 때 공감해준 건 한국 예술인이 아닌 외국인들이었다. 이씨는 틈틈이 힌디어와 아랍어를 공부하고 있다.

“인도가 외교 5강으로 부상했잖아요. 외교부에도 인도부서가 생겼고. 그런데 문화 교류에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올 6월에 있는 러시아 월드컵이 끝나면 바로 카타르가 월드컵을 준비하는데, 한국이 아랍에미레이트(UAE)와 교류를 많이 하는데 그 나라와 단교한 카타르에도 신경써야 하는 거 아닐까요?” 이씨는 드라마 등 문화 예술 영역에서부터 교류가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 2015년 카타르내셔널 데이에 참석한 배우 이매리씨와 알 데하이미 주한 카타르 대사. 사진=이매리 제공
▲ 2015년 카타르내셔널 데이에 참석한 배우 이매리씨와 알 데하이미 주한 카타르 대사. 사진=이매리 제공

그는 한국 드라마 산업 책임자들의 태도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배우나 스태프를 대할 때 또는 해외 문화를 대할 때 역지사지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중국에서도 그래요. 한국은 콘텐츠만 팔려고 한다고. 아랍영화제하면 한국인들은 아무도 없어요. 문화가 비슷한 동남아나 중국에서 한류라고 팔면 어느 정도 취향이 맞지만 그 외의 나라는 어떤가요. 인도에 한국 드라마를 팔려면 밥 먹는 장면부터 편집해야 해요. 거긴 소고기를 안 먹잖아요.”

교류가 활발해지면 콘텐츠 질도 좋아진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인도인들이 한국 드라마 보고 나서 ‘same emotion’이라고 많이 말해요. 인도는 종교가 많고 다양한 신화를 바탕으로 하니까 이야기가 풍성한데 한국은 그렇지 않은 거죠. 미국에서도 인도 콘텐츠에 대한 평이 좋아지고 있는데 한국은 준비가 됐는지 모르겠네요.”

이씨는 2014년 카타르수교 40주년을 맞아 세계 최초로 카타르 월드컵 성공 개최를 위한 콘서트를 기획하기도 했고 2015년 카타르 내셔널데이 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제작진이 저보고 왜 이렇게 열심히 했냐고 했잖아요. 전 원래 열심히 했어요. 재활하면서도 최선을 다했죠. 이제 몸도 괜찮아졌고 저도 다시 방송해야죠. 저 같은 피해자들의 고통도 인정받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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