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금융·언론계 등 각계 전문가들이 삼성그룹 총수일가 지배권 강화 쟁점을 언급한 자료가 재판증거로 제출됐으나 ‘삼성 뇌물 사건’ 2심 재판부는 입증이 부족하다며 “승계작업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론냈다. 승계작업은 ‘부정한 청탁’이라는 뇌물죄 요건을 이루는 것으로,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일부 무죄 선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특검은 이 부회장의 1·2심 재판부에 삼성그룹 총수 일가 지배권 강화 작업(이하 승계작업)의 존재를 인정한 △청와대 경제수석·민정수석실 △금융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정보원 등의 각종 보고서를 증거로 제출했다. 승계작업을 언급한 증권사 분석보고서 및 언론사 기사도 증거로 제출됐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은 뒤 석방되고 있다.ⓒ민중의소리

청와대 민정수석실 자료엔 “지금이 삼성의 골든타임,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세자 자리 잡아줘야” 등의 노골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2014년 7월 우병우 당시 민정수석의 지시로 이영상 전 청와대 행정관이 작성한 ‘삼성 리포트’ 메모 내용이다.

이 메모자료엔 ‘삼성의 경영권 승계’ 및 ‘당면 과제는 이재용 체제 안착’ 등의 명시적인 문구도 발견됐다. “우리 경제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이건희의 유고 장기화로 인해 삼성의 경영권 승계가 가시화되는 국면 → 경제에 대한 실질적 기여 기회로 활용” “삼성의 당면 과제는 이재용 체제의 안착. 과제 해결에는 정부가 상당한 영향력 행사 가능. 윈윈 추구할 수 밖에 없음” 등이 기재된 부분에서다.

청와대 경제수석실은 ‘2015년 7월 박근혜-이재용 독대 말씀자료’를 작성하면서 승계작업을 적시했다. 말씀자료엔 ‘지배구조가 조속히 안정화돼 삼성이 미래를 위해 매진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이 정부 임기 내에 승계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한다’ 등의 내용이 적혀 있다.

국정원이 삼성그룹 계열사 구조조정을 승계작업으로 파악한 정황도 확인됐다. 국정원이 2015년 2월3일 작성한 ‘삼성그룹 2차 사업 구조조정 추진’ 문건엔 2015년 당시 이뤄진 삼성그룹과 한화그룹 간 화학·방위산업 4개사 빅딜에 대해 ‘이 부회장 지시를 받아 미래전략실 주도로 이뤄졌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어 국정원이 7월2일 작성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무산 가능성 제기’ 문건에는 ‘합병 주주총회를 앞두고 삼성그룹 측에서 의결을 위해 확보한 지분이 부족한 상황’이라거나 ‘국민연금이 합병 동의를 할 경우 합병 특혜설 공세가 예상돼 정부를 곤혹스럽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적혀 있다. 모두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장 등에 보고됐다.

직접 법정에 나와 승계작업의 존재를 증언한 공무원들도 있다. 삼성 측과 ‘삼성생명 금융지주회사 전환’ 건을 검토한 금융위원회 김아무개 사무관은 해당 건을 ‘삼성 대주주 일가 경영권 승계 작업’으로 이해했다고 1심 법정에서 밝혔다. 금융위 실무진들은 삼성 측 제시안에 대해 ‘대주주 추가적 자금 투입 없이 지배력이 강화된다’고 평가했다.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원회도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작업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2014년 금감원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관련 전망 보고서’엔 이건희 회장 건강이 악화된 직후 전망되는 삼성그룹 상속문제와 지배구조 개편문제가 담겨있다. 공정위도 유사한 취지의 보고서를 작성해 ‘삼성생명 등 4개 금융사가 27개 계열사에 출자한 상태로, 공익재단을 포함해 자사주를 통해 총수 일가 지배력을 뒷받침하고 있다’는 지배구조 현황 분석을 내놨다.

2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삼성그룹 승계와 관련된 여러 사정을 추론해 작성한 의견서에 불과하다”면서 “이것만으로 삼성그룹이 승계작업을 추진해 왔다고 직접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제출된 보고서가 승계작업의 존재를 입증하기에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2심 재판부는 그 근거로 “지배권 확보에 유리한 효과가 있다 해도 각 지배구조 개편 작업들은 경영상의 필요가 있었다”며 “이재용 개인에게 미치는 효과 크기도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밝혔다.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민중의소리
▲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죄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며 질문에 답하고 있다.ⓒ민중의소리

2017년 7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의 증인신문조서는 2심 재판부 판단을 정면 반박하는 증거다. 경제학 교수로 20여 년 넘게 삼성 지배구조 개편 작업을 감시해 온 김 위원장은 1심 법정에서 “우리나라 재벌은 기업집단인 동시에 특정 가문이 지배하는 패밀리 비즈니스 그룹”이라며 “두 개를 분리하는 건 인위적 주장이다. 재벌 현실을 이해하려면 특정 가문이 결합된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 따로 반박 설명을 적지 않았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이 부회장이 제3자 뇌물공여죄 무죄를 받는데 큰 영향을 줬다.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제3자 뇌물공여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특검은 승계작업을 부정청탁 대상으로 지목했고 1심 재판부도 수용했다. 2심에서는 승계작업이 없는 것이 되면서 청탁할 대상 자체가 사라졌다. 

특검은 지난 7일 입장자료를 내 “청와대, 정부부처, 민간 시장에서 모두 인정하는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 및 승계 작업의 존재를 항소심 재판부만 별다른 이유 설시 없이 불인정했다”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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