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신년을 맞아 띄운 것은 ‘좌파 헌법’이었다. 조선일보는 지난 2일 1면 머리기사 제목을 “헌법도 좌향좌… ‘비정규직 폐지’까지 넣었다”로 뽑았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자문위원회가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고 정리해고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며, 노조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좌편향적 내용의 헌법 개정안 초안을 마련한 것을 ‘확인’했다는 내용이다. 지난해 12월28일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교체되고 나온 신년 기획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날 조선일보는 “‘자유’ ‘시장’ 쪼그라들고… 국가주도 ‘사회적 경제’ 새로 넣고”, “파견근로 금지, 勞 경영참여… 이대로면 ‘노조 천국’”(4면), “야당이 넋 놓은 사이… 靑·與는 ‘좌편향 개헌안’ 밀어붙일 태세”, “자문위 경제 분과, 총 6명 중 4명이 진보 성향”(5면) 등의 기사를 펼치며 보수진영을 자극했다.

▲ 조선일보 2018년 1월2일자 1면 머리기사.
▲ 조선일보 2018년 1월2일자 1면 머리기사.
▲ 조선일보 2018년 1월2일자 4면.
▲ 조선일보 2018년 1월2일자 4면.
3일치 1면도 “병역 거부 허용, 헌법에 못박겠다니…”라고 뽑으며 “자문위가 헌법 개정안 초안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하고 사형제 폐지를 명시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큰일인양 보도했다. 

3일에도 “개헌 자문위의 무리수… 헌재 합헌 결정 ‘2개 이슈’ 뒤집기 시도”(6면), “野 ‘머리에 징 맞는 느낌’… 與 ‘개헌안 서두르겠다’”(8면) 등 2면을 털어 보도했다. 8면 톱기사는 “자문위 개헌 초안 정치권 강타”라는 부제목과 함께 정치권 반응을 담은 것인데 사실상 자사 기사에 대한 정치권 반응을 보도한 것이다. 실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난 3일 김종필 전 총리 자택을 찾아 “이 정부에서 하는 개헌 방향이 좌파 사회주의 체제로 근본 틀을 만드는 그런 개헌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조선일보 논조를 그대로 받은 발언이다.

3일치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자문위 초안에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 정책’이라는 문구가 ‘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통일’로 수정된 것을 두고는 “이는 통일 한국의 체제를 자유민주주의로 고집하지 않고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를 수용하거나 섞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아닌지 의심스럽다”며 “흡수 통일을 원천 배제한다는 의도일 것이다. 자문위 개헌안을 문리대로만 해석하면 사회민주주의식 정치·경제 시스템으로 나라를 바꿔도 되고, 인민민주주의 통일이 돼도 괜찮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조선일보 2018년 1월3일자 사설.
▲ 조선일보 2018년 1월3일자 사설.
그러나 국회 개헌특위는 특위위원인 여·야 현역 의원 36명과 외부 자문위원 49명이 참여해 운영되고 있다. 조선일보가 식겁한 ‘자문위’ 논의 내용은 어떠한 구속력이 없다. 이미 두 달 전에 개헌특위 홈페이지 등을 통해 공개된 내용을,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보고 받았던 안을 들고 언론과 정치권이 난리법석을 떤 것이다.

한겨레 정치 전문 기자들은 지난 3일 공개된 ‘한겨레TV’ 유튜브 방송 ‘한겨레 더 정치’에서 조선일보 보도에 논평을 했다. 김남일 한겨레 정치팀 기자는 “조선일보는 자문위 안을 마치 정부·여당의 흐름과 비슷하다며 마치 앞으로 지방 선거 때 개헌 동시투표를 하면, (자문위 안이) 개헌안 뼈대가 될 것처럼 확정적으로 써버렸다”며 “헌법 전문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빼버렸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보수진영이 금과옥조를 여기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는 제헌 헌법에는 없는 문장이고 1972년 유신 때 처음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 한겨레 정치 전문 기자들은 지난 3일 공개된 ‘한겨레TV’ 유튜브 방송 ‘한겨레 더 정치’에서 조선일보 보도에 논평을 했다. 김남일 한겨레 정치팀 기자의 모습. 사진=한겨레TV
▲ 한겨레 정치 전문 기자들은 지난 3일 공개된 ‘한겨레TV’ 유튜브 방송 ‘한겨레 더 정치’에서 조선일보 보도에 논평을 했다. 김남일 한겨레 정치팀 기자의 모습. 사진=한겨레TV
김 기자는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또 완전히 뺀 것도 아니”라며 “그 대목을 (자문위는) ‘자유롭고 평등한 민주사회 실현’이라고 했는데 사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조선일보는) 마치 밀실에서 추진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데 이미 다 공개된 자료인 데다 지난해부터 ‘국민 대토론회’가 진행됐던 사안이다. 지난해 11~12월에는 한국당 의원들까지 참여한 개헌특위에서 이 안으로 보고되고 토론까지 했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조선일보는 개헌을 자신들이 ‘어젠다 세팅’(의제 설정)을 해서 흔들어보려는 의도인 것 같다”며 “타사 정치부 기자들은 조선일보가 2일 연속으로 대서특필한 보도를 두고 ‘이런 보도는 정말 기사 쓸 거 없을 때 200자 원고지 4매 정도로 쓸 내용’이라고 평가한다. 조선일보는 어젠다 세팅을 하려 했을 텐데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보도였다”고 혹평했다.

성한용 한겨레 정치팀 선임기자는 “특종의 중요한 조건은 다른 언론사에서 특종을 받아주고 따라가느냐는 것”이라며 “뉴스가 된다고 판단하면 하루 이틀 늦더라도 따라가야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 보도는 다른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이건 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두 달 전부터 개헌특위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된 자료”라고 설명했다.

성 기자는 조선일보의 보도에 대해 “일종의 사상전이라고 본다”며 “촛불 혁명이나 문재인 정부 출범 자체를 ‘좌향좌’로 보는 거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정상화가 아니고 이 세상이 온통 왼쪽으로 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오른쪽 끝에서 세상을 보면 다 왼쪽으로 보인다. 조선일보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헌법까지‘도’ 좌향좌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 기자는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분들이 ‘큰일났다. 우리나라 망해가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극우 성향의 기득권 세력들 정서”라며 “이번 조선일보 기획은 그 사람들 정서를 담아 나라 걱정을 하는 건데 대국민 설득력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 한겨레 정치 전문 기자들은 지난 3일 공개된 ‘한겨레TV’ 유튜브 방송 ‘한겨레 더 정치’에서 조선일보 보도에 논평을 했다. 성한용 한겨레 정치팀 선임기자의 모습. 사진=한겨레TV
▲ 한겨레 정치 전문 기자들은 지난 3일 공개된 ‘한겨레TV’ 유튜브 방송 ‘한겨레 더 정치’에서 조선일보 보도에 논평을 했다. 성한용 한겨레 정치팀 선임기자의 모습. 사진=한겨레TV
김 기자는 “자문위 구성이나 그 결과물은 토론 대상이 될 순 있다”면서도 “그런데 갑자기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딱지를 붙이고 시작하니까 토론 대상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대상이 된 거다. 생산적 논의를 할 수 있는 주제에 ‘사회주의 딱지’를 붙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김 기자도 조선일보 보도를 “보수진영을 노려서 내놓은 기획”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지난 4일치에서는 조그마한 박스 기사 하나로 빠지더라”며 “조선일보 본인들도 더 이상 (정치권·언론 등이) 안 따라온다고 판단한 것 같다. 자유한국당 반응도 미지근하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조선일보는 과거와 같은 어젠다 세팅 능력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며 “보통 보수정당의 아침 지도부 회의에서 주요 메시지 공급원은 조선일보다. 조선일보 논조가 한국당과 잘 맞고, 보수진영이 골라먹을 수 있게 메시지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조선일보 사설을 그대로 읽는 이도 있다”고 말했다.

김 기자는 이어 “(조선일보 첫 보도가 있은) 1월2일 한국당 지도부 발언을 보면 첫 신년 회의인데도 홍준표 대표는 물론 아무도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하지 않았다. 장제원 수석대변인만 ‘충격을 넘어 머리에 징을 맞는 느낌’이라고 한마디했다. 지도부 중 어느 누구도 개헌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며 “자기네들도 ‘외부 자문위 개헌안 초안 갖고…. 우리당 의원들도 토론한 내용인데’라며 면구스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성 기자는 “보수 기득권 세력의 절대 반지는 색깔론과 사상전”이라며 “오래전까지 되짚자면 일제 강점기에서도 독립 운동하는 사람들을 좌익으로 몰아 목숨을 빼앗았다. 그런 행태를 아직도 반복하는 것이다. 지금도 일정 부분 이런 색깔론이 작동한다. 가려서 잘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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