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23일 국회에서 민주당이 회의를 열었다. 비공식 회의라 민주당 관계자 이외엔 회의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김진표 당시 민주당 원내대표가 당론과 달리 KBS 수신료 인상안 처리를 갑자기 합의해주면서 불거진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지 의논하는 자리였다.

다음날 당시 한나라당 한선교 의원은 민주당이 뒤에서 다른 말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민주당 비공식 회의 녹취록 문건을 꺼내들었다. 민주당은 반발하며 한 의원을 고발했고, 이 과정에서 장아무개 KBS 기자가 도청 당사자로 지목됐다.

KBS가 전사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웠던 사안인만큼 KBS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란 의혹은 무성하게 피어났다. 사실 관계는 확인되지 못했다. 조사 당국은 휴대전화와 노트북, 녹음기 등 도청에 직접 연관됐을 만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은 증거 불충분에 따른 무혐의로 수사 종료됐다. KBS도 민주당 도청 의혹과 KBS가 어떠한 연관도 없다고 여러 차례 반박했다.

파업 중인 KBS에는 이 사건을 다시 꺼내들고 도청 의혹의 ‘미싱 링크’를 좇는 기자들이 있다. 공정성이 무너지고 신뢰를 잃은 KBS에 가장 필요한 작업은 ‘저널리즘 복원’이라고 믿는 이들이다. KBS 기자협회 소속 진상조사위원회는 지난 7월부터 민주당 도청 의혹 사건을 다시 조사하고 있다. 조사 결과 고대영 KBS 사장을 포함해 당시 KBS 도청 의혹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은 이들의 발언이 공개되고 있지만 이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미디어오늘은 27일 오전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진상조사위원장을 맡은 정필모 기자를 만나 진상조사위원회 조사 뒷이야기를 들었다.

<관련기사: 고대영 KBS사장이 말했다는 ‘핵탄두‘는 무엇일까>

-조사 기간 2개월이 지났다. 현재까지 진실을 구성할 사실 관계 확보는 어느 정도 됐나.

“30% 정도다. 강제 조사권이 없으니 한계가 있다. 당사자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으면 말을 꺼낼 텐데 한 사람도 실토를 안 하고 있다.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2개월 간 사건 관계자 몇 명 정도 만났나.

“열 명 이상이다. 관계자 대부분은 만났다. 유일하게 접촉하지 못한 건 고대영 사장이다. 문자도 보내고 사무실도 찾아갔는데 경비나 비서들이 만날 수 없다고 막더라. 비서실장이 대신 전화했는데 ‘당분간 상황도 복잡하고 만날 계제가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밝혀지지 않은 의혹은 어떤 것인가.

“크게 두 가지다. KBS가 직접 도청 혹은 녹음을 한 것인지, 혹은 제3자가 녹음에 개입돼 있는지 여부다. 또 하나는 한나라당이 받은 문건은 누가 건넨 것인지, 건넨 건 누구 지시였는지다. 이게 가장 핵심 의혹인데 물증이 없다. 중요한 물증인 노트북과 휴대전화도 의혹 당사자가 정확히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얘기를 안 하니 알 수 없다. (편집자주: 진상조사위는 지난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동시에 분실한 경위에 대해 장 아무개 기자가 ‘휴대전화는 술자리로 가는 사이 잃어버렸고 노트북은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분실한 것이 맞다’고 답한 사실을 밝혔다.) 나는 특히 녹취록을 입수한 과정에 주목한다. (도청과 관련해) 기자 취재 과정이 과열되면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안 취재는 보도 목적보다도 자사 수신료 싸움에서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 더군다나 비윤리적으로 취재를 해선 안 되는 것 아닌가. 지금으로선 짐작하기도 쉽지 않지만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사건의 진상에 대해) 섣부른 짐작도 하지 않으려한다.”

▲ 정필모 KBS 기자협회 진상조사위원장. 사진=이치열 기자.
▲ 정필모 KBS 기자협회 진상조사위원장. 사진=이치열 기자.
-최근 고 사장이 당시 관련 내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이 공개됐다. 이준삼 전 정책기획본부장이 작성해 김인규 전 사장에게 건넨 임원회의 회의록이다. 관련 발언 내용이 사내 공식 문건으로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나.

“이번 문건은 진상조사위원회가 아니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에서 처음 확인한 것이다. 개인 비망록 형태인데, 김인규 사장 재임 시절 있었던 일을 김 사장이 직접 기록할 시간이 없었을 테니 본부장으로서 회의 발언을 기록해 김 사장에게 선물로 준 것 아닐까. 이 외에 회사 차원에서 남긴 임원회의 기록물이 있는지도 확인이 안 된다. 보도본부에서 사건진상 보고서를 만들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이번에 공개된 문건에 보면 휴대전화를 분실했다는 의혹 당사자에게 고 사장이 새 휴대전화를 건넨 것으로 추정되는 발언도 나왔다.

“고 사장이 휴대전화 여분을 해당 기자에게 줬다는 건데, 일반적으로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는 기자 개인에게 남는 단말기가 있다고 보도본부장이 (휴대전화를) 주는 경우가 있나. 뭔가 사건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KBS 구성원들은 통상적으로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면 단말기를 자기가 직접 사서 쓴다. 노트북은 회사 자산이니 잃어버리면 변상해야 한다. 의혹과 관련된 물증인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사건 직후 동시에 잃어버린 것 자체도 특이한 일이다. 사안과 관련돼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고대영 사장의 ‘핵탄두’ 발언도 공개됐는데 시사하는 바는 뭘까.

“기록이 사실이라면 상당히 파문이 있는 실체적 진실을 고 사장이 보도본부장으로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다. 일단 솔직히 털어놓고 책임질 일 있으면 책임지고 책임질 것이 없으면 안하면 된다. 그 기록(본부장이 작성한 임원회의록)대로라면 털어내야 할 진실이 있는데 안 밝힌 것 아닌가. 지금이라도 밝혀야 한다.”

-고 사장은 취재 경로에 제3자가 있다는 발언을 했다. 당시 민주당 쪽 도움이 있었다는 장 아무개 기자의 발언도 있었는데. 혹시 녹취 과정과 입수 등의 과정에 민주당이 연관됐을 가능성도 있나.

“민주당에 ‘당시 비공개 회의 목격자가 있는지’, ‘KBS 기자가 회의 직후 들어갔다가 나온 것을 봤는지’ 등을 질의한 상황이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답을 받진 못했다. 공식 질의를 한 지는 보름 정도 지난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제3자에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 당 소속 사람이 당 비밀회의 내용을, 발언 내용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적힌 녹취록을 기자에게 건넬 수 있을까. KBS가 도청을 하지 않았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빠져나가려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우리도 제3자를 통해 입수했다는 어떤 증거도 확인하지 못했고 진술도 진실인지 규명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진술 이외에 뚜렷한 증거가 없어서 쉽지 않은 조사인 것 같다. 조사도 8월 마무리 될 것으로 예상했는데 훨씬 길어지고 있다.

“관계자들이 입 열도록 설득하는 게 힘들다. 다른 건 별로 힘들지 않다. 말 그대로 순전히 발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간부들이 실토하겠나. 조사에 응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다. 진술도 거짓 진술일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조사 종결 선언을 하지 않았다. 이미 만난 사람을 또 만나야 할 수도 있다. 제대로 못 받은 진술이 많아서다. 그래서 우리는 관련자들의 일말의 양식과 양심, 그리고 기자 윤리에 호소한다.”

-조사위원회 활동에 대한 비판은 없나. 내부를 공격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조사 대상자 중 그런 얘기를 하며 조사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논리면 모든 조직이 비리 등 내부 문제를 감싸야 한다. 수신료로 운영하는 기관이 이 문제를 덮고 갈 수 있나? 사건 직후 회사 차원에서 조사하고 잘못이 있으면 조치를 취한 뒤 시청자에게 사과했어야 하는 문제다. KBS 기자 조직의 자정 능력을 보여주자는 차원이다. 의혹이 사실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니 더욱 자정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번 조사를 통해 실추된 KBS 뉴스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혹시 파업 진행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사실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고 보나.

“파업과는 무관하게 조사하고 있다. 검찰 수사도 본격화할 텐데 그 이후에 또 밝혀질 내용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조사에 한계가 있으니 적절한 시점에서 조사를 마무리 지을 예정이다. 누군가는 시간이 지나면 입을 열 수 있지 않을까. 특별하게 검찰 수사와 연계해 조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적절한 시점에 보고서를 만들고 마무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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