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KBS·MBC 블랙리스트 문건’을 만든 사실이 확인됐다. 문건에 따르면 당시 국정원은 정연주 전 KBS사장과 최문순 전 MBC사장 인맥을 배제하는데 직접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들을 보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연예인은 방송출연을 금지시켰다. 폐지되는 프로그램까지 있었다. SBS에도 연예인 퇴출을 압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방송사 경영진이 했어도 논란이 제기될 수 있는 사안인데 이 모든 과정에 대한민국 정보기관 국정원이 개입했다. 성숙된 민주주의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MB정부 국정원의 범죄행위도 문제지만 국정원 ‘범죄지침’을 그대로 따랐던 ‘언론사 관계자’들은 더 문제다. 이들은 MB정권이 국정원을 동원해 방송사 관계자들을 사실상 사찰하고 경영과 인사에 개입하는 상황에 동조하고 가담했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KBS본부)가 19일 성명을 통해 지적한 것처럼 “내부자들의 조력과 부역 없이 KBS 내부를 이렇게까지 자세히 파악하고 사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부자들’은 국정원에 협력하는 대가로 자리를 보존하거나 승승장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이 탄압한 대상이 자신의 동료이자 선후배 언론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과연 언론인 자격이 있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정원과 ‘내부자들’ 외에도 상당수 언론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언론이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영방송은 물론 많은 언론이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권력 비판에 소홀했다. 감시견 역할은커녕 대통령에게 질문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고 미리 짜놓은 질의응답을 마치 연기하듯 읊어댔다. 그것이 지난 9년 동안 독자들 눈에 비친 한국 언론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이들 가운데 반성이나마 제대로 한 곳이 있었던가.
언론책임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9년 동안 숱한 언론인이 정권과 그들에 충성하는 경영진에 의해 해직되거나 좌천·보복인사를 당했다. 그때도 상당수 언론은 침묵하거나 외면했다. 적극적으로 보도한 곳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랬던 언론이 이제는 블랙리스트 문제를 파헤치는 정의의 사도라도 된 것처럼 이 문제를 앞장서서 보도하고 있다. 최근 언론보도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 당직자가 작성한 비공개문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곳도 조선일보다. 조선은 문재인 정부와 시민사회의 공영방송 정상화 추진이 은밀하게 짜인 각본대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도했다. 일개 당직자가 작성한 문건 하나에도 이 정도 호들갑을 떨 정도면 정보기관이 작성한 블랙리스트에는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겠는가. 이제 그 답을 조선일보가 내놓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