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꿈을 펼치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할 어린 딸들이 아무런 연유도 모른 채 어머니 손에 목숨을 잃는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결과가 발생해 죄가 무겁다.”

법원의 준엄한 논고다. 옳다. 열한 살과 여섯 살이 꿈을 펼치고 건강하게 자랄 나이임은 굳이 판사나 검사, 기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다. 두 아이를 죽인 엄마의 죄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대구고법이 그 엄마의 항소심에서 원심과 동일한 징역 7년을 판결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항소는 검사가 했다.

나는 검사와 판사의 깔끔한 법적 잣대에 유감이 없다. 다만 인간적 유감은 크다. 논고가 준엄해 더 그렇다. 문득 하이네의 시 ‘눈물의 계곡’이 겹쳐온다.

“밤바람이 하늘의 창에서 쌩쌩 불어온다/다락방의 침대에는 누워 있다/바싹 여윈 창백한 얼굴들/가련한 두 연인들이//사내가 애처롭게 속삭인다/나를 꼭 껴안아 줘요/키스도 해주고 언제까지라도/그대 체온으로 따뜻해지고 싶어요//여자가 애처롭게 속삭인다/당신의 눈을 쳐다보고 있으면/불행도 굶주림도 추위도/이 세상 모든 고통도 사라져요//둘이는 수없이 키스도 하고 한없이 울기도 하고/한숨을 쉬며 손을 움켜 잡기도 하고/웃으며 노래까지 했다/그리고 이윽고 잠잠해져버렸다//다음날 아침 경찰이 왔다/훌륭한 검시의를 대동하고/검시의는 두 사람이 죽어 있음을 확인했다//검시의의 설명에 의하면/혹독한 추위와 공복/이 두 가지가 겹쳐서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적어도 죽음을 재촉한 원인이라는 것이다//검시의는 의견을 첨부했다/엄동설한이 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포로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동시에 영양을 충분하게 섭취해야 한다.”

아직도 이 땅에는 낭만적인 연애시인으로 더 알려진 시인의 슬픈 절창이다. 시공간은 다르다. 그 엄마는 반동국가 프로이센 아닌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하지만 생활고는 어금버금하다. 별거하는 남편이 보내는 생활비는 두 딸을 키우는 데 턱없이 부족했다. 임시직으로 일했지만, 큰딸이 소아 당뇨였다. 치료비와 교육비에 공과금 체납도 꼬리를 물었다. 두 딸이 지상에서 보낸 마지막 공간은 바닷가였다. 평소 먹고 싶어 했을 통닭이 최후의 만찬이었다. 이윽고 해변으로 산책에 나섰다. 방파제 끝으로 가자 두 딸은 “무섭다”고 했다. “엄마가 있잖아”라며 다독였던 그 엄마는 한쪽 팔에 한 명씩 딸을 안은 채 무서운 바다로 몸을 던졌다. 목격자 신고로 구조됐지만 늦었다. 그 엄마만 며칠 만에 병원에서 깨어났다. 이 참극을 전하는 보도에 네티즌이 첫 댓글을 달았다. “이게 다 쥐새끼와 닭년 때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물론, 그 비극은 박근혜 정권 때 일어났다. 하지만 모든 것이 “쥐와 닭” 탓이라는 안이한 인식이 끝 모를 비극을 낳는다. 인천시 부평에서 30대 엄마—그녀가 살던 연립단지에서 별명은 ‘천사표’였다—가 세 자녀와 투신한 것은 노무현 정부 출범 첫해였다. 당시 조선일보와 한국방송은 ‘비정한 모정’이라고 훈계했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진 14년의 세월 내내 대한민국 자살률은 압도적 세계 1위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올해도 이미 비극은 일어났다. 광주에서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모녀가 저수지에서 자살했다.

시장경제 체제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기만하거나 속단하지 말기 바란다. 얼마든지 비극을 막을 법제들이 있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법과 제도로 만들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나라 언론인들이 무지하거나 교활해서일 뿐이다. 이 나라 교수들이 저만 편히 살고 있어서일 뿐이다. 한창 꿈을 펼치고 건강하게 성장해야 할 어린 딸들이 차디찬 바다에 잠긴 까닭이다.

저 엄마에게 돌 던질 자 있는가. 있다면 얼마든지 던져라. 하지만 저 엄마가 갈 곳은 철창이 아니다. 상처를 치유할 공간이다. 과연 그 공간은 대한민국에 있을까. 늦었지만 향을 피워 두 영혼의 명복을 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