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11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헌재소장 인준안이 부결된 것은 1988년 헌재가 설립된 이후 최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퇴출시키기 위해 광범위한 공작을 벌이고, 이런 내용을 ‘VIP 일일보고’ 등의 형태로 청와대에 보고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이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던 문화예술인들의 출연을 집요하게 막은 정황도 밝혀졌다.

헌정 사상 최초 헌재소장 인준 부결

김이수 헌재소장 후보자 인준안은 지명 115일 만에 표결에 부쳐졌지만 끝내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국회가 지난 11일 본회의에서 김 후보자 인준안을 상정한 결과 찬성 145명, 반대 145명, 기권 1명, 무효 2명으로 부결됐다. 가결정족수는 147표였다.

민주당 지도부에서는 전날까지도 국민의당에서 25명 정도는 찬성할 것으로 파악했다. 더불어민주당 의원 120명과 정의당 의원 6명, 민주당 출신 서영교 의원과 민중통합당 의원 2명, 정세균 국회의장까지 130명이 찬성표를 던질 것이 확실하다면, 원내 40석을 가진 국민의당에서 17명만 찬성해도 가결이기도 했다.

▲ 한겨레 1면 사진기사 갈무리.
▲ 한겨레 1면 사진기사 갈무리.
이 때문에 부결 사태 원인을 주요 조간들은 국민의당으로 꼽았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당초 김 후보자 지명 반대를 당론으로 정했다. 더불어민주당도 국무위원을 맡고 있는 의원 5명을 포함해 소속 의원 120명 전원이 참석했다.

특히 이번 이탈 주역을 안철수 대표로 꼽는 분석이 다수다. 찬반 경계선에서 고민을 이어가던 국민의당 안철수계가 원내 존재감 확보를 위해 막판에 반대쪽으로 돌아섰다는 분석이다.

한국일보에 따르면 한 국민의당 관계자는 “안 대표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그동안 잠잠했던 안철수계 의원들이 ‘반대 이유가 있다면 확실히 행동하자’고 표결 직전 결심한 것이 김 후보자 부결에 결정타가 됐다”고 지적했다.

안철수 대표도 이날 표결 이후 기자들과 만나 “국민의당이 지금 20대 국회에서 결정권을 갖고 있는 정당”이라고 말했다. 사실상 국민의당이 이번 부결 사태를 주도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발언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김 후보자 부결 사태를 두고 야당이 ‘독주하는’ 문재인 정부를 견제한 결과라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특히 기사 제목에서부터 ‘안철수의 힘’을 보여준 표결이었다며 안철수 대표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나섰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도 “민주당의 일방통행 속에 한국당과 국민의당, 바른정당은 정당별 노선 차이를 부각시키기보다는 ‘3야(野)’라는 교집합을 통해 ‘신야권연대’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며 국민의당이 정부여당을 견제할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점에 주목했다.

[조선일보] '안철수의 힘' 보여준 표결… 지지율에 기댄 靑 _ 우리 갈 길 가겠다__종합 04면_20170912.jpg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김 후보자 낙마는 출범 4개월을 갓 넘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민의의 경고”라며 “이번 부결에서 확인됐듯,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선 협치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한겨레는 사설에서 “(국민의당 의원들이 부결에 동참한 것은) 결국 문재인 정권을 흔들어서 정치적 이득을 챙기겠다는 정략적 발상”이라며 “국민의 뜻과 상식적 판단에 따르기보다 ‘캐스팅 보트’ 권한을 드러내기 위해 ‘김이수 인준 표결’을 부결시키는 게 과연 새 정치를 내세운 정당이 할 행동이라 할 수 있는가”라고 꼬집었다.

▲ 한겨레 사설 갈무리.
▲ 한겨레 사설 갈무리.
문재인 정부 첫 정기국회에서 김 후보자 인준안 처리가 부결되면서 향후 개혁 입법 처리에도 빨간불이 켜졌다는 평가다.

이번 표결 결과로 호남 민심에서 국민의당이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있지만, 원내에서는 국민의당이 앞으로 검찰개혁과 방송개혁 등 주요 현안 입법 처리에서 캐스팅보트를 어떤 방향으로 행사하고 나설지가 관건이 될 수 밖에 없다. 조선일보 분석대로 국민의당이 매번 ‘신야권연대’에 동참하게되면 개혁입법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할 공산이 크다.

정부여당은 김 후보자 부결 결과를 받아들고 격앙된 반응을 내놓았다. 청와대 수석들은 “무책임의 극치”, “헌정질서를 정치적이고 정략적으로 악용한 가장 나쁜 선례”, “무책임한 다수의 횡포”같은 강한 표현으로 야당을 비판했다. 여당 한 중진의원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의당이 이제와서 제3당의 위력을 보여주겠다며 정략적으로 행동한 것”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도 수장 공백 8인 체제가 8개월 째 이어지고 있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특히 정치·사회적으로 논란이 불거진 사건들은 헌재 소장을 포함해 재판관 9명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결론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주요 사건들의 판단 보류 사태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정부여당도 결과를 낙관하다 야당과의 협치 노력에 소홀했던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야당이 아무리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논리도 명분도 없이 힘으로 국정을 발목잢는 것은 너무나 뻔뻔한 일”이라면서도 문 대통령과 여당의 노력이 충분치 않았다며 “집권세력의 이런 자세로는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MB 국정원, 김미화·김제동 찍어내려했다”

국가정보원이 이명박 정부 시절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방송인 김미화·김제동 등 정부에 비판적인 발언을 한 연예인의 퇴출을 압박한 것으로 11일 드러났다. 문화계에서도 특정 인물과 단체의 퇴출 및 반대 등 압박활동도 지시했다.

국정원 개혁위원회는 이날 국정원 적폐청산TF로부터 원세훈 전 국정원장 재임 시절 저지른 새로운 불법 활동 사실을 보고받고 원 전 원장 및 김주성 당시 기조실장 등에 대해 국정원법상 직권남용 금지 등 혐의로 검찰에 수사의뢰를 권고했다.

이명박 정부 국정원은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연예계 인사들을 ‘퇴출’시키기 위한 집요한 공작을 벌였다. 이 전 대통령 측근인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직접 2009년 2월 취임 이후 수시로 문화·연예계 내 특정 인물·단체의 퇴출 및 반대 등 압박 활동을 지시했다.

▲ 한국일보 7면 기사 갈무리.
▲ 한국일보 7면 기사 갈무리.
국정원이 분야별로 작성한 명단을 보면 문화계는 이외수·조정래·진중권 씨 등 6명, 배우 문성근·명계남·김민선 씨 등 8명, 영화감독 이창동·박찬욱·봉준호씨 등 52명, 방송인 김미화·김구라·김제동씨 등 8명, 가수 윤도현·신해철·김장훈씨 등 8명이 명단에 올랐다.

국정원은 퇴출 대상으로 선정한 연예인의 소속사에 대한 세무조사와 이들이 출연한 프로그램 편성관계자를 인사조치를 유도했다. 또한 국제영화제 위원장 후보에서 배제하거나 방송대상 수상작 선정에 관여해 탈락을 요청하기도 했다.

방송계에도 국정원이 직접 개입한 정황도 드러났다. 국정원은 2010년3월 당시 원세훈 원장의 지시에 따라 김재철 문화방송 사장 취임을 계기로 인적 쇄신과 ‘편파 프로그램’ 퇴출 등을 담은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도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2011년 MBC노동조합 특보에 따르면 김재철 전 MBC 사장은 여의도 MBC방송센터 7층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김미화씨에게 “라디오가 시끄럽던데, 다른 프로(그램)로 옮겨 보세요”라고 말했다. 같은 해 4월 결국 김미화씨는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DJ에서 물러났다. 또한 국정원은 2010년4월 김제동씨가 출연하던 MBC ‘환상의 짝꿍’ 폐지도 지시했다.

청와대 역시 ‘좌파성향 감독들의 이념편향적 영화 제작 실태종합 및 좌편향 방송PD 주요 제작활동실태’(2009년9월), ‘좌파 연예인 비판활동 견제 방안’(2010년4월) 등의 문서를 수시로 내려보내 대응을 지시했다.

이에 국정원은 ‘좌파 연예인 정부 비판활동 견제 방안’ ‘좌파 문화·예술단체 제어·관리 방안’ 등을 ‘일일 청와대 주요 요청현황’에 따라 ‘VIP 일일보고’ ‘BH 요청자료’ 등의 형태로 보고했다.

국정원이 박원순 서울시장을 ‘종북좌파’로 공격하는 정치공작을 벌인 사실도 드러났다. 

국정원 개혁위는 2013년 5월 언론에 공개된 ‘서울시장의 左편향 시정운영실태 및 대응방안’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등의 문건을 국정원이 작성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2009년9월과 2010년9월에도 당시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비판활동을 하고 원 전 원장에게 보고한 사실도 확인됐다.

‘보도지침’ 파문 윤세영 SBS회장 사임

박근혜 정부 당시 보도국 간부에게 “대통령을 도우라”는 보도지침을 내렸다는 폭로가 제기된 윤세영 SBS회장이 결국 사임을 표명했다.

윤 회장은 11일 오후 SBS 사내 방송을 통해 담화문을 발표하고 “SBS 회장과 SBS미디어홀딩스 의장직을 사임하고, 소유와 경영의 완전 분리를 선언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윤 회장의 아들인 윤석민 의장도 SBS이사와 이사회 의장직, SBS콘텐츠허브와 SBS플러스의 이사직, 이사회 의장 직 등을 모두 사임하고 대주주로서 지주회사인 SBS미디어홀딩스 비상임 이사 직위만 유지한다고 밝혔다.

윤 회장은 사임을 밝히면서 ‘보도지침 논란’에도 사과했다. 윤 회장은 “우리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개선하기 위해 부득이 당시 정권의 눈치를 일부 봤던 것도 사실이지만, 언론사로서 SBS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은 없다”며 “이런 충정이 돌이켜보면 공정방송에 흠집을 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SBS노조는 윤 회장의 ‘소유·경영’ 분리 원칙 천명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노조는 성명을 통해 “윤 회장은 이미 오래전부터 SBS에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대주주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사실상 모든 경영행위를 지배·통제해왔다”며 “이사 임면권을 계속 보유하겠다는 것은 SBS의 경영을 계속 통제하겠다는 뜻”이라고 비판했다.

이번 윤 회장의 사임은 ‘보도지침’ 파문이 올해 말로 예정된 방송통신위원회의 지상파 방송 재허가 심사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윤 회장의 사임이 문 대통령의 눈치를 본 결과가 아니냐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SBS는 오는 11월 재허가 심사를 앞두고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 시절 눈치를 봤다면 지금은 문재인 대통령 눈치를 보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일부 시민단체는 ‘SBS도 적폐’라며 공격하고 있다”며 “이런 와중에 나온 SBS 회장 사퇴 소식이어서 그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 조선일보 사설 갈무리.
▲ 조선일보 사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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