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부도덕하게 밀착한” 삼성 뇌물 범죄의 최고형을 징역 5년이라고 판단했다. 뇌물 제공은 대통령의 강요에 의한 것이고 승계작업으로 총수 일가 사익만 추구하지 않았다는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인 결과다. 특검 구형 12년형이 의도한 ‘정경유착 엄벌의지’는 사법부의 판단을 거치며 절반 이상 토막났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김진동 부장판사)는 25일 오후 2시30분 대법정 417호에서 열린 ‘삼성 뇌물 사건’ 선고 공판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5년,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 실장 및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에게 각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는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공여 등의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공여 등의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뇌물 규모는 433여 억 원에서 89억 2227만 원으로 줄었다. 삼성전자가 최씨 소유 회사 코어스포츠에 주기로 한 약속금액 135억 원 및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 원은 뇌물로 인정되지 않았다. 뇌물 89억 2227만 원은 정유라씨 승마훈련비로 지급한 금액의 일부인 72억 9427만원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준 16억2800만 원을 합친 금액이다.

‘재단 뇌물’ 건만 제외하면 특검이 기소한 혐의 대부분이 유죄로 인정됐다. 뇌물공여죄가 인정되면서 횡령, 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 혐의가 순차적으로 인정됐다. 72억 9427만원 중 삼성 소유물로 인정된 차량과 말 값을 제외한 64억 6295만 원에 대해 횡령죄가 인정됐다. 영재센터 후원금 16억2800만 원도 일체 횡령으로 인정됐다. 승마 뇌물이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을 법령을 위반해 해외로 도피시켰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절반 미만인 37억 3484만 원에 한해 재산국외도피죄가 적용됐다.

삼성전자와 코어스포츠 간 ‘허위 용역 계약’과 ‘말 세탁’도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으로 유죄가 났다. 재판부는 삼성전자가 코어스포츠에 준 64억 6295만 원이 범죄수익의 발생 원인을 가장한 범죄라고 판단했다. 삼성과 정씨 승마 코치 간 맺은 ‘말 세탁’ 매도계약 등은 범죄수익 처분 사실을 가장한 범죄로 인정했다.

재판부가 이 부회장의 청문회 증언을 거짓말로 판단함에 따라 위증 혐의는 모두 유죄로 선고됐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국회 청문회에서 ‘최순실·정유라 지원 사실을 보고받지 못했다’ ‘최순실·정유라를 알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재판부, 국정농단 엄중함 꾸짖으면서도 형량은 대폭 감경

구형보다 대폭 형량이 감경된 배경엔 축소된 범죄 금액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재산국외도피 죄는 특검이 12년 중형을 구형할 수 있었던 근거였다. 도피액이 50억 원을 넘길 경우 10년 이상의 징역형이 규정돼있기 때문이다. 특검은 도피액을 78억 9430만 원이라 봤으나 재판부는 37억 3484만 원만 도피 금액으로 인정했다. 도피액이 50억 원 미만일 땐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이 가능하다.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금 204억 원이 뇌물 금액에서 빠지면서 횡령 규모도 줄었다. 애초 특검은 298억 2535만 원을 횡령으로 특정했으나 이 중 80억 9095만 원만 횡령으로 인정됐다. 특가법(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은 횡령 이득액이 50억원 이상일 때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을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가 이 부회장에게 내린 5년 형은 재판부가 택할 수 있는 처단형 중 최하 형량이다. 재판부에게 주어진 형량 범위는 징역 5년 이상 45년 이하였다. 뇌물공여의 경우 징역 1개월 이상 5년 이하 형량이 주어지고, 특경법 위반의 경우 징역 5년 이상 30년 이하 형량이 주어진다. 특경법(특정경제 범죄가중처벌법)은 재산국외도피의 경우 징역 5년 이상 30년 이하를 규정하고 있다. 범죄수익은닉법위반의 경우 징역 1개월 이상 5년 이하 형, 위증은 1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이 주어진다. 경합범의 형량은 가장 무거운 죄의 형량에 2분의 1을 가중할 수 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승계과정에 대한 도움을 기대하며 거액의 뇌물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삼성전자 자금의 횡령, 재산국외도피, 범죄수익 은닉 범행에 나아간 사건”으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 사건의 본질“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국민들은 대통령 직무의 공공성과 청렴성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최대 기업집단 삼성그룹의 도덕성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면서 “대한민국의 최고 정치권력자인 대통령과 대규모 기업집단이 관련된 정경유착이라는 병폐가 과거사가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로 인한 신뢰감 상실은 회복하기 쉽지 않다”고 밝혔다.

동시에 재판부는 삼성 측 주장을 형량 감경 사유로 대폭 수용했다. 재판부는 피고인 5인이 “대통령에게 적극적·명시적으로 청탁을 하고 뇌물을 공여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지원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이어 삼성물산 합병, 삼성생명 금융지주회사 전환시도 등 “지배구조개편 작업이 삼성그룹과 각 계열사의 이익에도 기여하는 면이 있다고 인정된다”고도 밝혔다.

재판부는 또한 “부정 청탁의 결과로 대통령이 직접적인 권한을 행사해 삼성그룹이 부당하게 유리한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까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같은 양형사유를 종합해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형을 선고한 것이다.

▲ 선고 공판이 마친 오후 3시30분 경 삼성노동인권지킴이,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등은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 인도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부를 규탄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선고 공판이 마친 오후 3시30분 경 삼성노동인권지킴이,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등은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 인도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부를 규탄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솜방망이 처벌’ 논란은 선고가 끝나자마자 제기됐다.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은 25일 즉각 성명을 내 “재판부의 판단은 사실상 삼성그룹을 정권의 요구에 이기지 못한 피해자처럼 인식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며 “이 사건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위하여 발생했다는 점을 유죄인정의 근거로 삼은 재판부 스스로의 판단과도 모순된다”고 비판했다.

민변은 이어 “초 거대재벌인 삼성그룹이 그 사회적 책무를 무시하고 이재용 1인에 대한 경영권 승계를 위한 목적으로 부패한 정권과 공모해저지른 일이라는 점, 뇌물과 횡령, 재산국외도피라는 범행의 규모가 수 십억 원에 이르는 점 등을 모두 고려하면 이와 같은 양형으로 귀결될 수 있는지 의문“이라면서 ”결국 재판부는 또 다시 재벌 봐주기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선고 공판이 마친 오후 3시30분 경 삼성노동인권지킴이,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등은 서울중앙지법 정문 앞 인도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재판부를 규탄했다. 삼성전자 반도체공장 직업병 피해자인 황상기씨는 “김진동 판사는 이렇게 엄중한 죄를 짓고 온 국민을 혼탁에 빠뜨리게 한 이재용 부회장의 뇌물에 겨우 징역 5년형을 내렸다”며 “특검은 항소해서 2심에서는 이재용과 삼성을 경영하는 경영진에게 중형을 내려야 한다”고 발언했다.

삼성그룹 측 법률대리인 송우철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선고 후 기자들을 만나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즉시 항소할 것”이라며 “항소심에서는 반드시 사실 전모에 대해서 밝히겠다”고 말했다.

특검은 “재판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항소심에서 상식에 부합하는 합당한 중형이 선고되고 일부 무죄 부분이 유죄로 바로 잡힐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별수사본부가 설치된 서울중앙지검은 “검찰은 뇌물공여자 측에 대한 오늘 1심 선고 결과를 충분히 검토·반영해 수수자인 박 전 대통령, 최서원 뇌물 사건 공판에서 효율적인 공소유지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선고 직후 법정에선 짧은 시간 동안 고성이 오갔다. 파면된 전 대통령 박근혜씨의 지지자로 추정되는 일부 시민들이 “삼성은 이제 평창 올림픽 지원하지 마라” “말도 안되는 재판이다”라고 소리쳤다.

재판 종결이 선언되자마자 최지성 전 실장과 장충기 전 사장은 법정 구속돼 이재용 부회장과 함께 구속 피고인이 출입하는 문으로 나갔다. 박상진 전 사장과 황성수 전 전무는 묵묵부답으로 잠시 동안 법정에 서 있었다. 재판에 참관한 삼성 관계자들 또한 침묵을 유지하거나 고개를 숙여 바닥을 쳐다봤다.

특검팀은 재판 종료 후 신속히 법정을 나갔다. 특검 측에서는 이날 양재식 특검보, 장성욱 특검보를 비롯해 박주성·김영철·조상원·문지석 검사 등 12명이 선고 공판에 출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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