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로사는 쉽게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적지 않은 사건사고가 있었음에도 과로사 유족 모임이 왜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냐는 물음에 한 유족 A씨가 말했다. A씨는 자신도 과로자살로 남편을 떠나 보냈음에도 이를 알아차린 건 상당 시간이 지난 후였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과로사·과로자살(이하 과로사) 연구를 하고 돌아온 강민정 연구원이 겪은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강씨는 귀국 후 유족 모임을 만들기 위해 연락이 가능한 유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1~2년 전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근래 반향을 일으켰던 과로사 관련 언론보도를 본 뒤 “아, 그게 과로사였나요”라고 물어왔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는 아직 과로사에 대한 인식이 제각각일 정도로 과로사 문제 해결을 위한 준비가 미흡한 상태다. 유족 당사자, 연구자, 노무사 등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내는 평가다. 이에 일부 유가족들과 문제 해결에 공감하는 조력자들이 모였다. “일단 모여서 조금이라도 힘을 합치면 우리 목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지난 19일 오후 수도권 모처에서 ‘과로사 유족 모임’이 열렸다. 지난 달에 이어 두번째로 열린 모임이다. 유족 4명과 함께 상담가, 연구자, 노무사 등 모임을 지원하는 전문가들도 함께 했다.

남은 자의 고통, 함께 치유하는 모임 필요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당장 마주하는 어려움은 깊은 상실감이다. 이들은 같은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쉽게 의존할 수 없는 점을 지적했다. 1년 반 전 갑작스런 심근경색으로 남편을 잃은 B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도 죽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보면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면서 “모임에 오는 것 자체가 위로다. 내 말에 귀 기울이고 가슴아파 해주는 모임 자체가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 사진치료 프로그램 동안 D씨가 꼽은 사진들. 사진=손가영 기자
▲ 사진치료 프로그램 동안 D씨가 꼽은 사진들. 사진=손가영 기자

B씨는 과다한 업무량과 업무강도에 스트레스를 받아온 남편을 지켜봐왔다. 남편은 숨을 거두기 전 수백 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남편의 사인은 ‘불명’이었고 고인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부검을 실시하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업무스트레스가 정량되지 않고 부검으로 사인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산재를 불승인했다. B씨는 현재 공단과 행정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정주영 상담가는 사진 치유 프로그램으로 유족과 함께 했다. 유족들은 ‘내면 상태’, ‘고인을 연상시키는 사진’, ‘희망을 주는 사진’을 각각 한 장씩 골랐다. 정 상담가의 안내에 따라 유족들은 서로의 감정과 경험을 공유했다. “엄마가 ‘죽고싶다’고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봐 불안하다” “불안해서 밤에 혼자 불을 끄고 잠들지 못한다” 이들은 타인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상실감도 공유했다. 한 구성원이 울음에 북받쳐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할 때는 가만히 지켜보고 기다려줬다.

"40년을 쉬지 않고 일해와"… 산재 인정은 ‘명예회복’

D씨는 짙은 먹구름 속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사진을 골랐다. “조금 쉬었다 와도 되는데 40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먹구름이 고인의 고됐던 40년 삶과 같다던 D씨는 “이렇게 해서라도 이 사람의 죽음이 헛된 죽음이 아니라고, 명예회복을 시켜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D씨는 지난 6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의 ‘과로자살’을 인정받기 위해 산재 신청을 준비중이다. D씨 남편의 죽음은 지난 7월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그램에 다뤄지기도 했다. 남편은 삼성중공업 작업복과 안전화를 신은 채 발견됐다. 조선업계에 불황이 닥치면서 삼성중공업에도 구조조정이 시작됐고 연구직인 D씨의 남편도 관리부서로 자리를 옮기며 퇴직 불안 등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남편은 떠나기 전까지 정신과 치료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 정주영 상담가는 19일 열린 과로사 유족 모임에서 사진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 정주영 상담가는 19일 열린 과로사 유족 모임에서 사진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사진=손가영 기자

사측은 “고인이 3개월 동안 2시간 이상 초과근무를 한 날은 11일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현행 고용노동부 고시는 과로사와 연관된 뇌심혈관 질병의 경우 ‘발병 전 1주일 이내의 업무 양이나 시간이 일상 업무보다 30퍼센트 이상 증가한 경우’에 관련성이 강하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계 일각에선 근무 시간뿐 아니라 노동 강도, 노동 환경도 두루 살펴야 한다는 반박이 제기되고 있다.

과로사에 따른 산재 신청은 유족들이 겪는 두번째 어려움이다. 유족들은 과로사를 좁게 해석하는 근로복지공단의 업무 관행과 제도를 알기에 미리 산재 신청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업무량, 강도를 입증해야 할 책임이 신청자에게 있는 점도 지적했다. 사측의 업무정보 공개나 동료직원의 증언이 필요한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날 유족에게 산업재해법 기초 강의를 한 김우탁 노무사(노무법인 원)는 “택시기사가 과로사로 사망한 경우 회사가 택시 운행기록에 비협조적인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 노무사는 “한국은 과로사로 산재 인정을 받기가 굉장히 어려운 실정”이라면서 “기존 근무량의 30% 이상이라는 양적인 기준은 존재하지만 업무강도, 스트레스 등을 측정하는 질적인 기준에 대한 구체적인 잣대가 모호하다. 4차 산업혁명 등의 말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족들은 산재 인정을 “가족을 위해서 힘들게,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간” 고인이 헛되게 죽지 않았다는 “사회적 인정”이라고 한 목소리로 말했다. A씨는 남편의 산재 신청을 준비하면서 과로자살과 관련된 한국 석박사 논문은 다 읽었다고 말했다.

유족이 중심, 전문가·사회시스템은 조력자

강 연구원은 이 때문에 유족 모임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산재 신청 과정에서의 어려움부터 감정 치유까지, 전문가의 조력보다 유족들 간 공유하는 경험이 서로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다.

강 연구원은 “한국에 제대로 된 과로 개념이 없다면 우리가(유족이) 말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의 ‘전국과로사를 생각하는 가족회’(이하 가족회)를 사례로 들었다. 1991년 구성돼 현재 350여 명 유족 회원으로 구성된 가족회는 일상적인 교류를 통해 심리적인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연 1회 1박2일 학술 캠프를 여는 등 전문가 집단도 이들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다. 강씨는 “일본은 과로사를 둘러싼 사회 시스템이 정말 잘 돼있다”며 “사건이 발생하면 1명의 케이스를 풀기 위해 기자, 노무사, 변호사 등이 다 붙는다. 1년에 1박2일 캠프를 하면서 다양한 전문가들이 유족과 교류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과로사 등 방지대책 추진법(과로사방지법)’은 가족회의 8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제정됐다. 가족회는 8년 동안 거리로 나가 서명운동을 진행하며 시민들을 설득했고 직접 과로사를 공부해 법 초안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국회에도 과로사 방지법안이 발의돼 있지만, 강 연구원은 “유가족의 목소리가 반영돼 있지 않아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 연구원은 ‘과로사는 사회문제이므로 사회가 도와줘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란 질문을 시작으로 연구를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이 모여야 과로사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그는 3~4년 전부터 과로사 유족들을 만나왔다. 그러던 중 2017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관련 보도가 단초가 돼 구심점이 만들어졌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일하는 강씨는 가외로 시간을 내 과로사 유족 모임에 함께 하고 있다.

현재 과로사 유족 모임에 참여하는 유족은 10명 정도다. 대구, 창원, 광주 등 대부분이 각 지역에 흩어져 있어 모임이 쉽지 않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유족 C씨는 “한편으로 ‘이게 효과가 있을까’ ‘내가 상처받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다”면서 “‘하다보면 들리겠지’ 생각하면서 이 자리에 왔다. 혼자 얘기한다고 들리는 것도 아니고, 한 언론에서라도 글을 기고해주면 큰 소리는 아니더라도 작은 소리더라도 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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