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새벽, 25년차인 한겨레 김봉규 사진기자는 초고압송전탑 공사가 예정된 밀양 평밭마을 산꼭대기에서, 그날로 예고된 공권력의 행정대집행을 기다리며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수년간 국내외에서 기록해 온 제노사이드(대량학살)에 대한 사진작업의 일환으로 르완다에 다녀온 직후 밀양에 내려온 터라 피로는 쌓일 대로 쌓인 상태였다. 뭔가 사정이 있는지 행정대집행은 지연되고 있었고, 아침 9시 쯤 스마트폰 뉴스앱에서 ‘진도 해역 여객선 침몰’ 속보가 떴다. ‘큰 사고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대만 지진, 삼풍백화점 붕괴, 김해 중국민항기 추락 사건 등 굵직한 사고, 재난현장 취재경험에서 쌓인 직감을 믿고 바로 취재차량에 카메라를 실어 최고 속도로 진도를 향해 출발했다. 

진도로 가던 중 오전 11시쯤 전원구조 속보가 전해졌을 때 다시 복귀할까 생각했지만 이내 오보로 밝혀졌고, 곧 첫 사망자(세월호 2층 판매여직원)를 수습했다는 1보가 떴다. 사망자가 생겼다는 건 이미 전원구조는 아니며 제 2, 제 3의 희생자가 나올 수 있겠다는 직감이 들었고 진도로 향하는 취재차량의 속도계는 더 높아져갔다. 정오께 도착한 팽목항의 파도는 생각보다 잔잔했다. 3년 간에 걸친 김봉규 기자의 팽목항 사진 기록은 이렇게 시작됐다. 세월호가 침몰하고 인양되기까지 김 기자가 40여 차례 진도 팽목항과 침몰 현장인 동거차도 인근을 오가며 기록한 사진들을 묶어낸 사진집 <팽목항에서(눈빛)>가 발간됐다.

참사 당일, 해경에서 오후 12시 10분까지 쉬미항으로 오면 기자단을 태워서 사고해역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12시 5분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배는 떠났고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거리가 가까운 지방주재 기자 등, 먼저 도착한 기자들이 빨리 현장으로 가자고 재촉해서 예정보다 빨리 출발한 듯 했다. 하는 수 없이, 쉬미항 현장 스케치를 1보로 송고하고 다음 취재일정을 고심하던 그때 팽목항으로 생존자들이 오후 2시쯤 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해경이 구출한 사람들이 아닌,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거나 배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었다. 김 기자는 팽목항으로 이동하며 서울에서 내려오는 중인 동료 사진기자를 실종자 가족들이 내려오고 있는 진도체육관으로 보내 업무를 나눴다.

오후 네 시께 쉬미항에서 다시 세월호 침몰 현장으로 들어가는 해경정이 준비됐다. 20여 명의 타언론사 취재진들과 배를 타고 2시간여 들어가보니, 이미 현장에서는 세월호가 뒤집힌 채 선수 아래쪽만 바다위로 나와 있었고 어둠이 내리는 중이었다. 예상과 달리 구조 작업은 진행되고 있지 않았고 너무나 정적이어서 놀랐다. 주변에 큰 해상크레인과 해경정들이 있었지만, 해경 고무보트 한두 척이 선수 쪽을 서치라이트로 비추며 맴돌 뿐 잠수사가 들어간다거나 하는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취재진을 태운 배도 곧 철수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그때 어두워진 하늘에 조명탄 한 발이 떴고 그 아래, 304명을 태우고 뒤집힌 채 서서히 침몰해가는 세월호의 선수가 그 비극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장면을 기록하는 것 뿐 이었다. 바다 아래로 사라져가는 세월호를 사진으로나마 흔들리지 않게 붙들기 위해 100-400mm 망원렌즈를 끼우고 출렁거리는 파도의 고점과 저점에서 감도 16,800에 장노출(15분의 1초)로 숨죽여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찍힌 사진이 사진집 <팽목항에서>의 표지가 되었다.

▲ ⓒ 김봉규 기자
▲ 동거차도 앞바다 세월호 침몰현장. 2014. 4. 16. ⓒ 김봉규 기자

표지 사진과 함께 김 기자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단원고 한 여학생의 가방에서 나온 머리빗을 찍은 사진이다. 2014년 7월 중순 팽목항을 취재하다가 다른 기자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팽목항 입구의 한 천막을 발견했다. 팻말도 없던 그 천막 앞의 빨랫줄에 걸린 물건들을 자세히 보니 사고 현장에서 건져 올린 유류품들을 말리는 거였다. 그 천막에서 바닷물과 뻘을 씻어서 일차로 말려 안산으로 보내고 있는 듯했다. 거기에서 이틀 동안 촬영했는데 한번은 유류품으로 온 가방을 열었더니 단원고 명찰, 여학생 속옷, 꼬깔콘, 양파링 등 과자가 터지지 않은 상태로 있었고, 나무 몸체에 금속핀이 박힌 머리빗(브러쉬) 하나가 나왔다. 그 브러쉬에 촘촘하게 박힌 채 짠물에 녹슬어버린 금속핀 하나하나가 세월호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아이들처럼 보였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 자신도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고2 아들을 둔 아빠였기 때문이다.

▲ ⓒ 김봉규 기자
▲단원고 여학생 가방에서 나온 머리빗. 팽목항 유류품 보관소. 2014.7.16.  ⓒ 김봉규 기자


김봉규 기자는 3년 간 세월호 참사를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관련된 많은 책을 읽었다고 했다.  감정적으로 치우치는 것보다 이성적으로 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정확한 팩트와 정보를 얻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기억 속에, 사건과 관련된 이름과 숫자는 매번 틀리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두 권의 책이 큰 도움이 되었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한 권은 '세월호, 그날의 기록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 저)'이며 이 책은 유가족과 변호사, 한겨레 기자 등이 세월호 사건의 재판기록과 15만장에 가까운 문서를 분석 정리한 7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다. 또 한권은 일본의 정신분석학자 노다 마사아키의 저서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대형 참사 유족의 슬픔에 대한 기록' 이다. 두 권의 책이 큰 힘이 됐다고 한다. 

▲ ⓒ 김봉규 기자 페이스북 갈무리
▲ ⓒ 김봉규 기자 페이스북 갈무리

특히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를 읽고 참사를 당한 유가족들이 분노할 수 있도록, 슬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가족이 오랫동안 투병하다 죽으면 슬픔이 덜하지만 급작스런 사고사의 경우엔 가족들이 ‘아직 살아 있을거야’ 라며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고, 사고 초기에는 오히려 냉정해지고 슬퍼하지 않게 된다. 그 다음에 찾아오는 분노하고 슬퍼해야 하는 단계가 중요한데 그 때 감정이 표출되지 못하면 가족들 가슴 안으로 상처가 남게 되며 평생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나쁜 선택(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을 할 가능성이 많아진다. 

김봉규 기자는 "참사를 당한 유가족들이 슬퍼하고 분노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만 우리 사회는 참사의 원인과 책임자에 대해 아무 것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이제는 그만하라’ 했다. 대통령도 나 몰라라 했고, 진실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하는 유가족들 옆에서 이상한 단체들은 피자, 치킨 먹고 있었고... "라고 회상했다. 

▲ ⓒ 김봉규 기자
▲ 동거차도 앞바다를 찾은 단원고 안주현 학생의 어머니 김정해 씨. 2016. 4.22. ⓒ 김봉규 기자

김 기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사회가 전적으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충분히 분노하고, 슬퍼하게 해준 적이 있냐고. 그는 아직 미수습자 다섯 명이 남았는데 다 찾아내면, 모든 유가족들이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도록 품어주는 전 사회적 계기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한다. 물론 진실규명은 그것 대로 계속 되어야 하고. 

사진집 <팽목항에서>의 마지막은 동거차도에서 인양되어 물위로 떠오른 세월호를 찍은 것이다. 세월호가 인양되던 그날, 2017년 3월 24일의 기록을 끝으로 김봉규 기자는 한겨레21 내근 데스크로 발령을 받게 된다.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은 7월 30일까지 서울 류가헌 갤러리에서 전시중이다. 

201707251182_01.jpg
▲ 2014년 2월 중부전선 최전방 GOP 촬영 위해 항작사 시누크 헬기로 이동중인 김봉규 한겨레 사진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2014년 2월 중부전선 최전방 GOP 촬영 위해 항작사 시누크 헬기로 이동중인 김봉규 한겨레 사진기자.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