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예정된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전 부총리)의 KBS 라디오 녹화 방송 출연이 당일 정치적 이유로 취소된 것과 관련해, 한 교수는 “출연 취소 사태는 물론이고 KBS 내 구조·문화적 적폐 청산이 이뤄지지 않는 한 KBS에 출연하지 않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 교수는 지난 5일 이주향 수원대 교수가 진행하는 주말 KBS 1라디오 프로그램 ‘이주향의 인문학 산책’ 녹화 방송에 출연할 예정이었다. 지난 5월 펴낸 회고록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다.

하지만 녹화 방송 당일 제작진으로부터 출연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원 전 KBS 1라디오 국장이 “이 책은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인 인문학이 아니다”, “현 대통령을 옹호하는 회고록으로 정치적 오해를 살 수도 있다”는 취지로 불가 입장을 밝혀 출연이 취소됐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 통일·교육부총리를 지냈고 해방 이후 지식인으로 살아온 그의 출연 불가 소식은 KBS에서 다시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진 계기가 됐다.

▲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전 부총리). ⓒ 연합뉴스
▲ 한완상 서울대 명예교수(전 부총리). ⓒ 연합뉴스
이에 대해 KBS는 “이번 KBS 1라디오 이주향의 ‘인문학산책’ 프로그램의 한완상 전 부총리 출연 취소는 프로그램 PD와 담당 국장간의 협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제작진 차원에서 이뤄진 조치”라며 “KBS 라디오센터는 이제원 담당 국장이 출연자 결정 과정에서 주관적인 잣대를 적용했다고 판단해,  한 전 부총리에게 정중하게 사과드리고 양해를 구했으며 향후 KBS 라디오에 출연하겠다는 의사도 전달받았다”고 주장했다.

KBS는 이제원 전 국장을 지난 10일 직위해제하고 전략기획실 방송문화연구소 방송문화연구부로 전보 조치했다. 하지만 언론노조 KBS본부는 “고대영 사장이 퇴진하지 않는 한 ‘꼬리 자르기’는 어림없다”며 “한 전 부총리는 우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KBS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은 적이 없으며, 적폐 청산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KBS의 여타 프로그램에 출연할 생각이 없다고 거듭 밝혔다고 한다. 이런데도 사측은 사태를 무마해보고자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일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KBS 라디오센터는 노조 성명에 대해 “KBS 라디오센터장은 지난 9일 한 전 부총리가 다니는 교회를 찾아가, 예배 이후 점심 식사 자리에서 다시 정중하게 사과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출연 요청을 드렸다”며 “이에 대해 한 전 부총리는 시간을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출연 의사를 밝혔다”고 재반박했다.

이와 관련해 한완상 교수는 13일 오후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KBS 해명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면서 “이번 사태는 이제원 국장 한 개인의 실수가 아니라 KBS의 구조·문화적 적폐에서 비롯한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KBS에 출연할 일은 없고 출연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전했다”고 말했다. 사실상 KBS가 정상화하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한 교수는 지난 10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도 “유신 때에는 방송을 녹화한 뒤 끝내 방송이 못나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녹화 당일 못나오게 하는 경우는 처음 겪는 일”이라면서 “언론 적폐가 얼마나 깊게 구조화된 것인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KBS 그 자체가 적폐라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이번 논란을 부른 당사자인 이제원 전 국장은 박근혜 탄핵 직후인 지난 3월 자신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20대 국회’, ‘헌법재판소’라고 쓰인 근조 리본으로 교체하는 등 탄핵에 반대하는 뜻을 표현해왔던 인사다. ‘5·18 북한군 침투설’과 같은 근거 없는 ‘가짜뉴스’를 페이스북에 게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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