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뉴스’ 논란이 불거지면서 ‘미디어 리터러시’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언론, 시민사회, 정부가 개별적으로 실시해온 미디어 교육을 체계적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언론 주도로 실시돼온 기존 미디어 교육은 ‘혁신’을 전제하지 않는 한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언론사를 위한’ 교육에서 벗어나 진짜 ‘비판적 읽기’를 위한 언론의 역할을 고민할 때다.

학생들 ‘철구’ 보는데 신문교육이 통할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언론사 이름을 말해보세요.” 한 기자가 초등학생 대상 특강에서 던진 질문이다. “디스패치요”라는 답이 가장 먼저 나왔다고 한다. 정부 지원으로 개설된 신문읽기 강좌를 수강했던 한 대학생은 “제공되는 신문을 잘 가져가지 않는다. 포털로 읽는 게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신문이 ‘종합편집의 예술’이라거나 ‘매일 뉴스를 보고 신문을 읽어야 행간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여전히 유효한 평가다. 그러나 문제는 주된 교육 대상자인 10대와 20대가 올드미디어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울에서 미디어교육을 해온 한 교사는 “교육의 대상자는 인터넷 방송을 더 보고, 더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현재 미디어 교육 논의는 동떨어졌다”고 비판했다. 이 교사는 KBS뉴스나 조선일보 보도가 아니라 학생들이 BJ 철구의 대사 ‘앙 기모띠’를 따라하는 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 종합일간지.
▲ 종합일간지.

이 같은 ‘미스매치’가 일어난 원인은 언론이 ‘언론사 수익을 위한 미디어 교육’을 중점적으로 펼쳐왔기 때문이다. 과거 미디어 교육은 신문과 한국언론진흥재단 중심으로 NIE(신문활용교육)를 주력으로 해왔다. 방송통신위원회 산하 시청자미디어재단은 지역 센터별로 방송사와 제휴를 맺어 왔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연구서를 통해 꼽는 해외사례를 보면 핀란드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통해 신문 구독률이 올랐다거나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신문을 구입해 청년들에게 무료로 배포한다는 식의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언론진흥재단이 과거 퇴직 언론인을 강사로 한 미디어 교육을 실시했으나 ‘혹평’을 받고 폐지한 바 있다. 최근 언론재단은 포털 뉴스소비환경까지 고려한 ‘뉴스리터러시’ 교육으로 개편했으나 여전히 한발씩 늦고 있다.

독자에게 맞는 기사부터 공급하자

최근 한겨레가 기사 제목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전 대통령’으로 부르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문’이라고 써 비판을 받았다. 언론은 지면, 포털 제목 편집 때 줄이 넘어가면 호칭을 빼기 때문에 언론 입장에서는 논란이 된 것 자체가 당혹스러운 일이다.

한겨레 이재훈 기자는 전화항의를 받은 일화를 페이스북에 소개했다. 독자는 한겨레의 해명에 “모바일로는 ‘문’ 제목이나 ‘박 전 대통령’ 제목이나 ‘두 줄’”이라고 반박했다. 이재훈 기자는 “‘플랫폼 디바이스’마다 제목 길이 같은 게 달리 보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고 밝혔다.

독자는 모바일 환경까지 왔는데 언론은 종이신문과 TV방송, 혹은 포털 중심 공급에 그친 것이다. 뉴스가 이미 콘텐츠 낱개단위로 소비되고 있는데 ‘우리 매체의 다른 기사를 함께 보면 공정하다’는 답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 일러스트=권범철 만평작가.
▲ 일러스트=권범철 만평작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미디어를 통해 이슈를 이해하는 것’과 ‘매체비평을 통해 보도의 이면을 읽는 것’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목표를 위해서는 ‘읽히는 기사’부터 만들어야 한다. 노컷뉴스의 ‘씨리얼’이나 SBS ‘스브스뉴스’처럼 사드배치, 최순실 게이트 등 현안을 쉽게 이해하는 해설기사를 만드는 게 좋은 예다. 뉴욕타임스는 디지털 전략의 일환으로 ‘데일리 브리핑’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VR콘텐츠를 쏟아 내거나 페이스북에 더 많은 기사를 올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독자’에 맞는 ‘소통’을 하는 게 핵심이다. ‘중학생만 돼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한국 신문의 편집원칙은 중학생도 못 읽는 내용이 많다는 점에서 문제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해 변화한 매체환경에도 맞지 않다.

프랑스 언론 몽꼬띠디엥(Mon Quotidien, 나의 일간지)은 7~10세, 10~14세, 14~17세 대상 일간지를 따로 발행한다. 같은 사안이라도 연령에 따라 다른 수준의 언어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5년 파리 연쇄 테러 때 몽꼬띠디엥은 ‘왜 그들은 우리를 공격했는가’ 등을 담은 해설기사를 썼고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했다.

‘미디어 속 이슈를 이해하는 것’보다 ‘미디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둘은 별개가 아니다. 보수신문이 노동조합에 악의적인 기사를 썼다면 필요한 건 핀란드식 ‘뉴스 신뢰도를 판단하기 위한 해체 방법론 7단계’가 아니라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이해’다. 기사부터 읽히게 만들어야 한다.

▲ 프랑스 몽꼬띠디엥 파리 테러 특별판.
▲ 프랑스 몽꼬띠디엥 파리 테러 특별판.


언론은 ‘뉴스검증에 필요한 정보’ 제공해야

읽히게 만든 다음 ‘비판적 읽기’를 위해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할까? ‘가짜뉴스’ 논란이 불거지면서 비평의 한 종류인 ‘팩트체크’가 ‘미디어 리터러시’의 본질처럼 인식되곤 한다.

팩트체크는 필요한 과제지만 표면적인 왜곡을 바로잡을 뿐 미디어를 이해하는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소유구조 △광고주 △정치권력이 보도에 영향을 미치는 게 핵심이고, 유통 측면에서는 ‘포털의 기계적중립 편집’과 ‘SNS의 필터버블’을 이해하는 등 광범위한 비평이 필요하다.

언론이 보도를 할 때마다 자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고백하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 언론사 구성원들이 내·외부 ‘비평’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방식으로 학교, 시민단체 등 미디어 교육기관에 ‘좋은 교재’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다. 윤영태 동의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국 미디어교육의 출발점은 땡전뉴스가 나온 80년대”라고 밝혔다. 해외와 달리 미디어 교육의 한국적 맥락은 왜곡된 언론문제를 개선하는 것이고, 이 과제는 현재도 유효하다.

최근 SBS가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해양수산부와 거래해 세월호 인양을 늦춘 것처럼 보도해 논란이 제기되자 언론노조 SBS본부는 진상조사 결과를 세세하게 공개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료가 공유되면서 독자들은 발제기사 초고, 데스킹 이후 버전 등 보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알게 됐다. 이는 뉴스제작과정과 데스킹의 문제를 설명하는 좋은 교재가 될 수 있다.

형식에 그치는 독자위원회, 시청자위원회 제도도 개선해야 하며 이명박 정부 이후 자취를 감춘 ‘비평 프로그램’ 부활을 통한 상호비평 활성화도 필요하다. 2001년 MBC가 ‘미디어 비평’을 선보였으며 2003년 KBS ‘미디어 포커스’ EBS ‘미디어 바로보기’가 탄생했다.

이들 프로그램은 방송 비평에 소홀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당시 여론영향력이 막강했던 보수신문의 왜곡보도와 사주 문제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물론, 이들 프로그램이 부활한다면 신문 뿐 아니라 뉴미디어와 ‘유통환경’에 대한 비평도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비평이 답이냐”는 반론이 나올 수 있지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자체가 정답 없이 공론장에 의존해왔다. ‘좋은 뉴스를 고르라’는 시험문제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공론에 맡기는 편이 바람직하기도 하다. 윤영태 교수가 “최근 하버마스의 이론이 미디어교육의 핵심적 틀이 됐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해외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가짜뉴스’를 쏟아낸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됐다. 미국은 지난해 KBS가 ‘미래의 조건 뉴스 리터리시’ 다큐멘터리를 통해 ‘뉴스 리터러시 선진 사례’로 소개한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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