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KBS로부터 출연 보류 통보받아 논란이 되자 KBS 측이 거듭 해명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황씨가 출연 예정이던 ‘아침마당’은 시사·보도 프로그램도 아닌 교양 프로그램이었고, 과거 여당 후보를 지지했던 다른 프로그램 출연자들과도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유무형의 ‘KBS 블랙리스트’ 의혹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황씨와 KBS 측이 서로 인정한 사실관계를 정리하면, ‘아침마당’ 제작진은 지난 6일 황씨를 만나 ‘목요특강’ 출연을 제안하고 ‘맛있는 식재료 고르는 요령’을 주제로 강연하기로 의견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러다 14일 황씨가 문 전 대표를 지지하는 자발적 전문가·시민 네트워크인 ‘더불어포럼’의 공동대표로 참여했고, 이를 확인한 제작진이 16일 황씨에게 ‘사실상의 대선정국 돌입한 현시점의 민감성을 고려해 출연 시기를 잠정 연기해 줄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황씨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누구이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명할 수 있으며 그 신념의 표명으로 방송 출연 금지 등의 불이익을 받을 수는 없다”고 제작진에게 항의했고, 18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문제를 공론화했다.(관련기사 : KBS, 문재인 지지했다고 맛칼럼니스트 출연 금지 논란)

KBS ‘아침마당’ 홈페이지.
이 소식을 접한 시청자들의 반발은 거셌다. “황교익씨가 아침마당에 출연해서 갑자기 문재인 지지 선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정치적 선호와 가치관을 방송사에서 조사해 제재를 가하는 게 민주주의 국가의 공영방송에서 할 일이냐”, “KBS는 정치 프로도 아닌 아침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의지도 검열하느냐”는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문 전 대표 측도 20일 “납득할 만한 조치가 없는 한 오는 25일로 예정이었던 KBS 신년기획 ‘대선주자에게 듣는다’(좌담회) 출연은 취소할 수밖에 없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문 전 대표 측 김경수 민주당 의원은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자유롭게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힐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KBS 아침마당 제작진이 내놓은 해명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며 “누군가를 좋아하고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방송 출연을 금지한다면, 지금 사법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블랙리스트’와 본질적으로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고 지적했다. 

황씨가 참여한 더불어포럼도 19일 “황씨는 정당인도, 정치인도 아니다. 그가 출연하기로 한 프로그램이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는 방송도 아니다”며 “그는 문화계 전문가로 ‘맛있는 식재료 고르는 요령’을 강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엄정한 정치중립’ 운운하며 문화계 전문가의 방송출연을 금지하는 것은 공영방송 스스로가 ‘블랙리스트’를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처럼 ‘KBS 블랙리스트’ 논란이 계속되자 KBS 홍보팀은 보도자료를 내어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 참여한 개그맨도 아침마당 제작진이 이를 인지한 뒤 출연정지 시킨 사례가 있고, 지난해 총선 출마를 하고 전국구 후보 신청을 한 이들에게도 제작진은 선거 기간 이전에 출연을 정지시킨 바 있다”며 “KBS는 황씨와 같은 사례 발생 시 ‘방송제작가이드라인’을 원칙으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KBS 관계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아침마당’ 제작진이 적용한 ‘제작가이드라인’은 ‘실무자를 위한 KBS 공정성 가이드라인’ 중 ‘선거보도’ 세부준칙의 일부 내용이다. 제작진은 이 준칙을 과거에도 ‘아침마당’에 일관되게 준용해 왔다고 해명하고 있다.  

▲ 지난해 1월21일 여수MBC ‘브라보! 멋진 인생’ 방송화면 갈무리.
하지만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는 “그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해당 조항은 ‘선거보도’, 즉 선거기간 중 ‘보도’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참고해야 할 ‘가이드라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며 “시사프로그램이나 뉴스가 아닌데도 가이드라인을 억지로 적용, 출연을 취소할 수 있다는 회사의 논리에 누가 쉽게 수긍할 수 있겠느냐”고 꼬집었다. 

실제 지난 2012년 10월 KBS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던 탤런트 최불암씨도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하기도 했다. 당시 KBS 측은 “진행자가 정치적 의사를 피력할 여지가 없는 교양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방송사가 자율적으로 (교체를) 결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거 기간 KBS의 방송 출연 기준에 대한 잣대가 늘 일관됐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원장은 공영방송이라도 헌법에서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침해하거나 고무줄 잣대로 출연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 원장은 “특정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 문제지만, 그게 아니고 과거 지지 성명을 발표했거나 선거 캠프 출신 등이어서 못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며 “엄격하고 공정하게 잣대를 들이대면 되는데 필요에 따라 야당 성향엔 그런 잣대를 들이대 못 나오게 하고, 여당 성향엔 관대하게 봐줘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 다른 언론학자는 “특정 후보자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힌 사람의 출연을 제한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이상 크게 무리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기존의 유사한 사례에서 일관성 있게 출연을 금지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특정 후보 지지자가 나와 그 후보와 관련된 얘기를 하거나 보도 프로그램이 아닌 곳에서 특정 후보에게 유·불리한 정보를 받아 올바른 선택을 하기 어렵게 하는 상황이 있으면 출연을 제한하는 게 맞다”며 “그렇지 않다면 무조건 금지해선 안 되고, KBS가 일관성 있게 기준을 적용하되 민주주의 사회에서 좀 더 폭넓은 해석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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