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생활을 할 때 걱정을 덜 수 있을만큼 제도적으로 지원을 해줘도 ‘내가 이제 잘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고 살아갈 것 같아요. 위쪽 사람들이라고 해야하나, 전혀 청년 세대들을 잘 안 바라봐 주는 것 같아요. 희망이 없는 청년 세대들이 나중에 기성세대가 될텐데, 이대로 흘러가면 (한국 사회가) 점점 많이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한 대기업에서 웹 프로그래밍 분야 일을 시작하게 된 장은수씨가 ‘KBS스페셜’ 제작진에게 꺼낸 말이다. 그가 일하고 있는 곳은 한국이 아닌 일본의 회사다. 그는 낯선 일본땅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

▲ KBS스페셜 '청년탈출 꿈을 찾아서'의 한 장면 갈무리.
지난 25일 KBS스페셜은 ‘청년 탈출 꿈을 찾아서’ 편에서 해외로의 취업을 꿈꾸거나 이미 일을 하고 있는 여러 청년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KBS스페셜 팀과 인터뷰한 23살 이자룡씨는 호주 캘굴리 지역의 한 호텔에서 객실청소와 레스토랑 접시닦는 일을 3개월째 하고 있다. 호주에 정착한지 3개월 만에 이자룡씨는 약 300만원 을 모았다. 한국에서는 3년을 일해도 모을 수 없었던 돈이었다. 동네 마트 알바를 뛰며 받았던 돈은 시간당 4200원이었다. 당시 2012년 최저임금은 4580원이었다.

이씨는 한국에 있을 때 가장 괴로웠던 순간을 “3일 내내 고시원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영국드라마만 보고 있었을 때”라고 답했다. 이씨는 신문배달과 마트배달, 놀이동산과 편의점 알바 등 쉬지 않고 일했다. 그럼에도 잔고는 언제나 빠듯했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는 항상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씨에게 힘든 시간은 일할 기회조차 없었던 순간이었다.

일본 오사카의 한 대게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고 있는 대학생 박종현씨에게도 한국에서의 취업 준비는 무기력과 좌절의 경험으로 남아있다. 수없이 많은 이력서를 썼지만 박종현씨는 부모님이 사준 면접용 정장을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다. 택배 알바조차 4대1의 경쟁을 뚫지 못해 떨어졌다. 

▲ KBS스페셜 '청년탈출 꿈을 찾아서'의 한 장면 갈무리.
박씨는 “한국에선 면접에도 떨어지고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있었을 때는 제 자신이 한심하고 진짜 바퀴벌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며 자조했다. 그는 "그래도 일본은 이력서를 넣으면 받아주고, 능력을 인정해줬다"면서 "일본에 있는 동안 최대한 열심히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KBS스페셜 취재팀이 해외에서 만난 청년들은 하나같이 한국에서의 경험을 좌절과 분노, 절망의 기억으로 설명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으며, 설사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지옥같은 노동환경을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다.

김지현씨는 캐나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약 3년 간 일했던 한국의 병원에서는 평균 15명의 환자를 돌봐야 했다. 죽조차 삼키기 어려울 정도로 몸에 무리가 왔다. 6kg이 훌쩍 빠졌고 침을 맞아가며 버텼지만, 결국 김지현씨는 한국을 ‘탈출’했다.

김씨는 “캐나다에서는 기본적으로 돌보는 환자가 간호사 1명 당 4명”이라고 설명했다. 덕분에 한국과 달리 환자의 상태를 면밀히 체크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김씨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주말에는 요양원에서 일한다. 이 요양원에서는 반드시 하루에 한 시간씩 휴식시간을 가져야 한다. 김씨는 이처럼 적절한 휴식이 주어지는 노동 환경이 결과적으로 환자에게 돌아가는 간호의 질도 높아지는 결과를 낳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의 직장을 버리고 ‘탈조선’한 또 다른 사례도 있었다. 이명은씨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웨딩플래너와 회계업무 등 다양한 일을 했다. 한국을 떠난 이유는 업무환경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이다. 세금을 빼면 90만원 남짓의 월급만 남는 ‘88만원 세대’였다.

▲ KBS스페셜 '청년탈출 꿈을 찾아서'의 한 장면 갈무리.
그나마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주말에 격주로 쉬면서 150만원을 받았던 공무원 학원에서 일할 때였다. 이명은씨의 남편으로, 한국을 떠나 캐나다에서 용접 일을 하며 약 7000만원 가량의 연봉을 받고 있는 김재환씨는 한국을 두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한 보답과 보상을 받지 못하는 나라”라며 “답답하고 안타까운 나라”라고 말했다.

KBS스페셜이 최근 넘쳐나는 해외 취업 성공담 보도와 조금 달랐던 것은 이들이 한국을 떠나게 된 사연에 집중했다는 점에서였다. 최근 쏟아지고 있는 일부 언론의 해외 취업 성공담 중심의 보도는 한국에서 좌절에 빠진 이들에게 보란 듯, 정규직과 칼퇴근이 보장되는 ‘유토피아’는 조금만 열정을 쏟아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가까운 곳에 놓여있노라고 이야기한다.

조선일보에서는 지난 27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잡노마드 시대가 온다’는 기획기사를 내놓았다. 소위 스펙 벽에 걸려 쓴 맛을 본 청년들이 국내에서의 기득권과 편견이 작동하지 않는 해외에서 실력만으로 인정받고 취업에 성공한 ‘잡노마드’가 됐다는 것.

지난 23일 “‘취업 족쇄’ 보란 듯이 깼다…‘지·여·인’들의 유쾌한 반란”에서는 국내 취업에서는 발목을 잡는 지방대와 여성, 인문계라는 조건을 가진 이들도 해외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아 취업에 성공했다며 6명의 사례를 전했다. 한국에서는 사실상 항공사 승무원으로는 신입 입사가 어렵다고 평가받는, 아이를 가진 한 30세 여성이 말레이시아 항공사에서는 최종합격이 가능하고, 아랍에미리트 항공사로 이직까지 성공했다는 사례도 포함됐다.

▲ 조선일보의 지난 25일 8면 기사 갈무리.
조선일보는 5회차 기획을 통해 업무와 상관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사례와 외모지적과 성차별로 얼룩진 갑질 면접, 칼퇴근이 보장되지 않고 업무시간 외 근무가 많다는 점 등 주로 기업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전체적으로 해외 취업의 장점과 준비할 때 주의할 점, 그리고 한국의 기업들이 어떤 채용제도를 만들어야 할지에 주목하는 기획이었다. 해외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었을 수도 있고, 유익한 정보였을 수 있다.

다만 조선일보 기획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왜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게 됐는지, 60~70년대 고도의 성장을 이룰 만큼 ‘한강의 기적’이 가능했던 역동적인 나라라고 하는데 왜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기적을 기대하지 않는지에 대한 사회적 서사는 지나치게 축약돼있다. 개인의 열정과 채용 과정을 개선하려는 기업의 노력을 촉구하는 것만으로는 청년 세대의 한국 사회를 향한 무기력과 비관은 쉽게 설명이 어렵다.

지난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진취적이고 적극적으로 미래를 개척”하라는 조언을 내놓았다. 우리나라를 안 좋은 곳으로 비관하는 단어인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는 점도 꼬집었다. 박 대통령은 자기비하와 비관, 불신과 증오는 변화와 발전의 동력이 없다고 긍정의 에너지로 이겨내자며 청년들을 독려했다.

KBS 스페셜팀이 만난 청년들의 말에 따르면 ‘진취’와 ‘열정’은, 노력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환경에서 적용 가능하다. 가족과 친구도 없고 낯선 언어로 혼자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는 쉽지 않은 환경임을 해외 취업을 준비하는 이들도, 그리고 성공한 이들도 모두 알고 있다. 해외가 그저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도 아니다. 

이들에겐 노력하면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축사와 조선일보의 기획기사 모두 ‘노력으로 성취가 가능한 한국 사회’가 우선돼야 한다는 점을 간과한 셈이다. 

▲ KBS스페셜 '청년탈출 꿈을 찾아서'의 한 장면 갈무리.
KBS스페셜팀이 해외에서 만난 청년들은 쉽지 않은 타지 생활 중에도 묵묵히최선을 다하며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김지현씨는 캐나다의 대학을 졸업하고 현지 병원의 간호사가 되어 영주권을 취득할 예정이다. 김재환씨는 또다른 용접전문자격증을 취득했고 캐나다에서 아이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갈 계획이다. 다만 그들이 희망으로 가득한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는 자리는 이제 한국이 아닌 외국이다.

KBS스페셜은 “우리가 만난 청년들은 쉽고 편한 세상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이들이 바라는 건 노력한 만큼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고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다. 타국의 고된 환경 속에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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