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은 시대를 담고 있다. 국가와 국민에 대한 공적, 그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와 공론의 산물로서 훈장 수여는 공정(公正)한 원칙과 기준에 기반을 둬야 한다. 그러나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세력은 정당성 없는 정권에 부역한 인사들에게 훈장을 남발했다. 친일파를 비롯한 부역자를 체제 유지의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인 것이다.

미디어오늘은 KBS‧MBC 양대 공영방송사 사장들의 훈장 내역을 통해 ‘불편한 진실’을 다시 확인했다. 특히 제5공화국 신군부의 언론인들은 정‧관계 및 언론계를 오가며 권력의 언론장악에 헌신했다. 언론인 대량해직, 언론사 통폐합, 언론기본법, 땡전뉴스와 보도지침에 동조했던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누린 것뿐 아니라 각종 상훈도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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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지침’ 이원홍과 ‘괴벨스’ 허문도의 ‘훈장’

이원홍(87) 전 KBS 사장은 1956년 한국일보 견습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고 편집국장 등을 거친 뒤 1979년 12월부터 대통령 민원수석비서관을 지냈다. 1980년 7월부터 1985년 2월까지 KBS 사장을 지낸 뒤 문화공보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5공화국 핵심 실세였던 그는 고(故) 허문도 전 국토통일원 장관, 이진희 전 MBC 사장과 함께 언론인 대량해직, 언론사 통폐합, 언론기본법제정, 보도지침 등 신군부의 언론 통제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특히 문공부 장관이던 시절에는 당시 허문도 차관과 문공부 홍보조정실을 통해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시달하며 언론 통제의 첨병 역할을 했다.

그가 받았던 훈장 4개 가운데 3개는 전두환 정권 때 받은 것이다. 먼저 1982년 9월3일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1986년 9월5일에는 문화공보부 소속으로 청조 근정훈장을, 1988년 2월4일에는 대한무역진흥공사 소속으로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 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 무궁화대훈장. 사진=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
이원홍 전 사장은 이진희 전 MBC 사장과 ‘땡전뉴스’ 경쟁을 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85년 2·12 총선보도로 절정을 이룬 그의 불공정 방송은 ‘KBS 시청료 거부운동’이라는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지난 2011년 12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측근인 이원홍 전 사장을 통해 1980년 방송 통폐합에 대한 유감의 뜻을 전달했다. 이 전 사장은 JTBC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거기(언론 통폐합)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느끼고 있다”며 “언론계가 여러 고난을 겪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까지도 이 전 사장은 매체 기고를 통해 언론인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별세한 허문도 전 장관도 1980년 10월25일 국보위문공위 소속으로 보국훈장 천수장(3등급)을 받았다. 보국훈장은 ‘국가안전보장에 뚜렷한 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한다. 1992년 5월8일에는 국토통일원 장관의 공로가 인정돼 청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근정훈장은 공무원 및 사립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한다.

▲ 보국훈장 천수장. 사진=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
조선일보 기자 출신 허 전 장관은 신군부의 ‘괴벨스’로 악명 높았다. 그는 12‧12 군사반란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찾아 언론계 정화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인 권정달 전 의원 등과 함께 1980년 7․8월 언론인 700명을 대량으로 해직하는 ‘언론 대학살’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고,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옮긴 뒤에는 언론 통폐합을 실행했다. 그는 1989년 5공 청문회 당시 “언론 통폐합은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1986년 ‘보도지침’을 폭로하며 신군부의 언론장악 실상을 알린 김주언 전 KBS 이사는 “이원홍씨와 허문도씨는 신군부 언론장악의 1등 공신들”이라며 “통상 훈장은 국가나 국민에 기여한 이들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언론장악을 충실히 이행했던 사람들이 나눠먹은 꼴이 됐다”고 비판했다.

이원홍 전 사장보다 앞서 KBS 사장에 부임했던 고 최세경 전 사장(1979년 2월~1980년 7월)은 박정희 집권 시기인 1970년 10월13일 “민주언론의 창달과 언론인의 자질 향상에 기여한 공이 많다”는 이유로 고광만 경향신문 사장,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장기봉 신아일보 사장 등과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최 전 사장은 1993년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은 바 있다. 문화공보부 차관 출신인 초대 KBS 사장 고 홍경모씨도 박정희 유신 때인 1973년 2월22일 황조 근정훈장을, 1960년 1월1일 녹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전 장군님” MBC 이진희·KBS 정구호도 ‘근정훈장’

“그동안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한 이후 괄목할 만한 사회개혁 성과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지 않나 싶다. 국보위를 만드시고 맡아 오시면서 노고가 크신 전 장군께서는 새 시대를 영도해야 할 역사적 책무를 좋든 싫든 맡으셔야 할 위치에 있다.”

5월 광주로부터 3개월이 지난 1980년 8월, 이진희 MBC․경향신문 사장은 전두환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처럼 면전에서 낯 뜨거운 ‘찬양’을 쏟아냈다. 앞서 4월 서울신문 주필이던 그는 “역사의 무대는 바뀌고 있다”는 시론을 통해 “80년대 이후의 새 시대가 함축하는 의미와 민족사적 진로의 향방, 그리고 이를 주도할 새 엘리트층의 등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군부 도우미’를 자처했다. 그는 1980년 7월 MBC·경향신문 사장 취임사에서 “언론인은 국가관이 투철해야 하며 체제의 수호자가 돼야 한다”고 선언한 뒤 그해 7월15일 간부직원 177명의 사표를 제출받고 41명을 쫓아냈다. 나흘 뒤에는 차장 이하 전 직원 사표를 받아 56명을 쫓아내 신군부의 ‘언론계 자율정화’의 시범을 먼저 보였다.

그는 1982년 5월 MBC 사장에서 문공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85년 2‧18 개각으로 교체된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해 3월13일 이 사장에게 ‘청조 근정훈장’을 내렸다. 문공부 장관 후임은 앞서 설명한 이원홍 전 KBS 사장이었다. 경쟁자에게 밀린 설움을 ‘훈장’으로 달랬던 것일까. 이진희 전 사장은 1988년 언론청문회에서 ‘신군부 찬양 기사’에 대해 “민간 우위의 정치가 되기엔 여건이 안 돼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한 뒤 “한 시대의 일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서 하는 일이다. 내가 5공화국에서 잘못한 일이 있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진희 전 사장이 경향신문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서울신문에서 데려온 인물은 정구호 전 KBS 사장(1986년 8월~1988년 11월)이다. 이진희 전 사장은 1980년 정 전 사장을 경향신문 편집국장에 앉혔고, 정 전 사장은 이듬해부터 경향신문 사장을 맡은 뒤 1986년 2월 청와대 대변인에 임명됐다.

신군부에서 정 전 사장이 받은 훈장은 모두 3개다. 그는 경향신문 편집국장이던 1980년 12월10일 새마을훈장 협동장을 받았는데, 새마을훈장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가사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받은 인사들에게 수여 한다. 그가 경향신문 사장이던 1982년 12월5일에는 “교권확립과 교원사기진작에 끼친 공로”를 이유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 새마을훈장 협동장. 사진=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
정 전 사장은 1984년 ‘88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한 준비연구’라는 극비문서 작성을 주도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문건의 목적은 “제5공화국의 정치체제와 전 대통령 각하의 통치이념을 지속적으로 발전‧정착시키기 위해 전 대통령 각하의 지도하에 민정당이 최소한 2000년까지 집권을 계속하도록”하고 “88년 이후에도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계속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정 전 사장은 1988년 12월 국회 청문회에서 극비문건과 관련해 “외부의 협조의뢰나 지시가 전혀 없었다”며 “1983년 5월부터 12월까지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향후 10년 국가발전 심포지엄에서 각 분야의 미래전략을 조명하며 토론을 벌였는데 정치 분야에서 1988년 평화적 정권교체 실현여부가 핵심적 문제였다”고 밝혔다. 그는 KBS 사장에 임명된 직후인 1986년 9월에도 청와대 대변인 활동 등을 이유로 ‘황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으로 이진희 전 MBC 사장의 후임이었던 고 이웅희 전 MBC 사장(1982년 6월~1986년 2월)은 청와대 대변인을 거친 뒤 MBC 사장이 됐다. 그는 이진희, 이원홍에 이어 1986년 8월 문공부 장관에 취임한다. 그는 1985년 3월3일 은탑 산업훈장을, 1992년 5월8일에는 청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후임 황선필 전 MBC 사장(1986년 2월~1988년 8월)도 청와대 대변인 등의 경력으로 1986년 5월20일 황조 근정훈장을 받았다.

황 전 사장의 훈장의 영예는 MBC에서 계속되지 못했다. 1987년 6‧10 민주화 항쟁에 힘입어 MBC 구성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방송 민주화의 열망이 노조 결성으로 폭발한 것이다. 이들은 황 전 사장에 대해 “MBC를 정부 홍보기관의 늪 속으로 더욱 함몰되게 한 정치권력의 주구”라고 비판했다. MBC 노조는 ‘공정방송 사수’를 기치로 내걸어 1988년 방송사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황 전 사장은 파업 사흘 만에 사퇴했다.

노조에 맞선 공영방송 ‘훈장’ 사장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임명된 공영방송 사장들도 훈장 수상자들이다. MBC의 경우 최창봉 전 MBC 사장(1989년 2월~1993년 3월)은 퇴임 후인 1997년 9월 방송문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고, 같은 날 고 이득렬 전 MBC 사장(1996년 7월~1999년 2월)도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최 전 사장은 방송문화진흥회법에 의거해 임명된 최초 사장이자 전문 방송인 출신이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 사퇴했다. 그는 1990년 9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비판적으로 다룬 ‘PD수첩’의 ‘농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편을 방송 몇 시간 전에 불방 결정을 내렸고, 불방 사태에 항의한 안성일 노조위원장과 김평호 사무국장을 해고했다. 이듬해에 불거진 ‘최 전 사장을 유임시키라’는 정권 외압설은 1992년 MBC 노조의 ‘50일 파업’의 도화선이 됐다.

이득렬 전 사장은 MBC 공채 3기다. 그의 취임 당시 MBC노조는 “독재 권력 아래에서 정경부장과 사회부장, 간판 뉴스 앵커를 지내면서 언론인의 자세를 저버리고 권력에 굴종했던 전력”을 문제 삼았다. 실제 정부는 1987년 2월16일 한국방송 60주년을 맞아 방송 유공자에 대한 시상을 했고, 이득렬 전 사장은 화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노성대 전 MBC 사장(1999년 3월~2001년 3월)은 1980년 MBC 보도국 부국장 재직 당시 보도국 편집회의에서 “정확한 상황도 모르면서 광주시민을 어떻게 폭도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가 계엄포고령을 위반, 계엄사에 연행된 뒤 서대문구치소에 구속 수감되면서 같은 해 해직됐다. 1989년 복직해 해설주간, 워싱턴지사장, 광주MBC 사장 등을 지낸 그는 MBC 사장 퇴임 후인 2007년 9월3일 방송 80주년을 맞아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 금관 문화훈장. 사진=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
언론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으로 꼽히는 김중배 전 MBC 사장(2001년 3월~2003년 3월)의 훈장 기록은 없다. 다만, 1973년 5월 발행된 관보 등을 보면 김 전 사장이 박정희 정권의 유신 선포 직전인 1972년 8월15일 25명의 언론인과 함께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그의 직책은 동아일보 사회부 부장이었고, 같은 날 원로 지식인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도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울려 퍼졌고, 언론 자유 쟁취를 위해 유신에 맞선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5년 대거 해직된다. 김 전 사장은 지난해 1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난 비겁한 게 아닐까 회의하는 게 아니라, 비겁했다고 단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동아일보 후배들이 ‘독재 권력의 통제’에 맞섰다면, 그는 ‘자본의 언론 통제’에 항거하며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1991년 사표를 내고 야인(野人)이 됐다.

김인규·길환영 KBS 사장도 ‘훈장’

KBS 역시 민주화 이후에도 ‘훈장’은 이어지고 있다. 문민정부 시기인 1993년 취임한 홍두표 전 KBS 사장(~1998년 4월)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6년 1월1월 한국방송광고공사 소속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1997년 9월에는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뒤를 이은 고 박권상 전 KBS 사장(1998년 4월~2003년 3월)은 한국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을 지낸 뒤 1980년 신군부가 추진한 언론인 대량해직 사태에서 ‘친DJ 언론인’으로 분류돼 강제 해직됐다. 그는 ‘부산아시안게임 개최’ 공로로 2003년 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임명했다가 노조와 시민사회 반발로 자진 사퇴했던 서동구 전 KBS 사장(2003년 3월~2003년 4월)은 경향신문 편집국장이던 1976년 12월10일 새마을포장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역시 1980년 경향신문 해직 언론인 출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언론 통폐합과 언론인 대량해직의 여파가 그만큼 컸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언론특보 출신인 김인규 전 KBS 사장(2009년 11월~2012년 11월)은 퇴임 후인 2013년 2월6일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 전환’을 이유로 은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산업훈장은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며 역시 5등급(금탑, 은탑, 동탑, 철탑, 석탑)으로 분류된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설 특별사면에 이어 강만수 전 기재부 장관, 김인규 전 사장 등 자신의 측근들에게 훈장을 수여해 임기 말 ‘측근 챙기기’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 은탑 산업훈장. 사진=대한민국 상훈 홈페이지
흥미로운 것은 김 전 사장 역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는 점이다. 1987년 민정당을 출입했던 김 전 사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월15일 “민주정의당은 무엇보다 구 정치 질서의 청산과 개혁을 위해 새 시대 새 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새 역사 창조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세월호 참사 직후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청와대‧KBS사장 외압 폭로로 방송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길환영 전 KBS 사장(2012년 11월~2014년 6월)도 지난 2013년 12월13일 ‘방송콘텐츠 산업발전 공로’로 은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현직 공영방송 사장이 이 훈장을 수상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해괴, 아니 진귀한 기록을 세우게 됐다”고 비판했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명확한 공적이 있는 게 아닌데도 공영방송 사장이라는 이유로 정치권력이 챙겨주는 식의 훈장 수여가 남발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 때문에 훈장의 가치가 떨어지게 되고 다시 남발하는 악순환이 반복돼 왔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특히 1980년대에는 언론인으로서 결코 할 수 없는 부역 행위에 대해 정권이 어떤 식으로든 보상을 해줘야 할 부담이 있었을 것”이라며 “마찬가지로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크게 후퇴된 공영방송의 상황을 보면, 지금도 훈장 등으로 공영방송사 사장들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이 (정권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정치권력에 기여했느냐에 따라 훈장을 수여하는 한 훈장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주언 전 이사는 “언론장악에 앞장섰던 인물들에 대한 훈장은 박탈해야 무너진 민주주의와 언론이 바로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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