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소 하루 뒤 박성수씨 첫 목적지는 대구 수성경찰서였다. 박씨는 대구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8개월 내내 ‘출소하면 누굴 가장 먼저 찾아갈까’ ‘수성경찰서를 어떻게 혼내줘야 하나’를 고민했다. 박씨는 경찰서 앞에서 “8개월간 이를 갈았다! 폭력경찰 각오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서 “오늘은 예고편이니 장기전을 기대하라”고 외쳤다. 경찰서를 오가며 얼굴을 익힌 몇 경찰은 “이 정권에서 고생하신다”라며 조용히 악수를 하고 지나갔다.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8개월간 구금됐던 박씨가 지난 22일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구금에서 풀려났다. 대구지법(제2형사단독 판사 김태규)은 22일 박씨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박씨는 지난 4월 ‘검찰이 권력의 주구가 됐다’는 항의의 표시로 대검찰청 앞에서 ‘멍멍’이라고 외치다 긴급체포 당한 바 있다.

검찰은 박씨가 이전부터 배포해왔던 전단지 내용을 문제 삼아 명예훼손죄를 적용했다. 전단지 제목은 “박근혜도 국가보안법 철저히 수사하라”와 “정모씨 염문을 덮으려고 공안정국 조성하는가”이다. 박씨는 박 대통령이 2002년 방북 당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과 만나 “김정일 장군을 믿을만한 파트너”라 말한 데 대해 국가보안법 수사대상이라고 주장했고 세월호 참사 당시 확인되지 않는 ‘7시간’을 덮기 위해 ‘종북몰이’를 강행하느냐고 조롱했다.

박씨에 대한 체포는 “대통령 비판 재갈 물리기냐” “표현의 자유를 심각히 훼손한다” 등의 비판을 거세게 일으킨 바 있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3일 출소 후 잠시 서울을 방문한 박씨를 만나 그간의 심정을 들어보았다.

- 8개월을 구치소에 있었다. 바깥 공기를 쏘는 소감은?

“태양 빛을 쐬고 흙을 밟을 수 있는 게 가장 좋다. 제일 힘들었던 게 빛을 못 쐬는 거였다. 내가 있었던 방엔 쇠파이프에 반사된 빛 몇 줄기가 방에 들어오는 것이 고작이어서 가끔씩 손을 대고 있곤 했다.”

   
▲ 12월 23일 서울역 인근 카페에서 만난 박성수씨. 사진=손가영 기자
 

- 집행유예가 떨어질 줄 알았나?

“무리하게 기소되고 구속까지 된 상황인 데다 대구 특유의 보수적 정서가 있어서 “못 나가게 되면 여기서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했었다. 판결이 계속 연기돼 온 것도 있었고. 불안감이나 두려움도 없지 않아 있었는데 워낙 훈련이 잘 돼 있어서 잘 극복했다.“

- 훈련이 돼 있다고?

“올해 초 군산에 살 때 노역을 했다. 비리혐의가 발각돼 사퇴한 군산시의회 사무국장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시의원 출사표를 던진 것을 알고 시위를 했다. 너무나 부당하다는 생각에 “군산시의회가 쓰레기장이냐”라고 피켓시위를 했는데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이 부과됐다. 150만 원이 부과돼 노역을 했다. 벌금형 100만 원 이상이면 5년간 피선거권 박탈되는데 내년 대통령 선거 나가려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게 됐다.

이때 경험도 있고 9년 동안 유랑하며 심신이 단련돼있다. 전단지를 나눠주며 전국 240여 개 자치구를 다 도는 걸 목표로 유랑을 시작했다. 전단지는 “환경을 살리자” “지구를 보호하자” “어려운 사람 돕고 살자. 서로 나누고 살자” 등이 적힌 것이다. 대놓고 쌍욕하면서 전단지를 찢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야영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 공원 한구석에 텐트 쳐 놓고 잤다. 도로 옆에서 잔 적도 있는데 밤새 차가 다니니 깔리는 생각하면서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추워서 떨기도 하고. 그렇게 오래 생활하니 굉장한 인내력이 생겼다.“

박씨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설득해보자’는 마음에 전단지 배포를 시작했다고 한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장애인 복지원에서 일을 하던 중 캠페인의 효과를 알게 됐다. 박씨는 초등학생을 상대로 장애에 대한 인식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장애인은 내 친구’라 적힌 전단지 배포 후에 그 인식이 상당히 개선된 것을 확인한 적이 있다. 박씨는 “집회 같은 활동도 중요하지만 씨 뿌리듯 일반인들의 의식을 바꿔나가야 큰 문제가 발생할 때 사회가 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전북 군산 핵폐기물 건립 반대 운동 때 전단지 배포 활동을 처음 시작했다.

박씨는 하루에 3만 명을 본다고 기준을 잡고 총인구를 3만으로 나눈 값인 4년 103일을 유랑 기간으로 잡았다. 그러나 시간은 9년으로 늘어났다. 한겨울과 한여름엔 일용직 등의 일을 하며 돈을 벌었고 이동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박씨는 전남 영광에서 시작해 대구, 부산 등 방방곡곡을 다니며 190여 개 자치구역을 들렀다. 박씨는 “올해 3월 날 풀리는 때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구속당해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 생활비 부분이 걱정이 되는데, 돈은 어떻게 버나?

“한겨울과 한여름에 돈을 번다. 건설사 인부 일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을 한다. 이렇게 벌고 쓰고 하면서 산다. 돈 쓸데도 많이 없어서 지출이 크지 않다.”

- 경찰서에 개 사료를 뿌리거나 택배로 보내는 등, 경찰과 검찰을 ‘도발’하는 것 같은데 이유가 있나?

“이상하게 보는 건 아는데 냉정하게 계산을 해서 하는 행동이다. 투쟁 현장을 많이 다니며 경찰의 ‘법대로 해라’는 태도를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자기들 잘못은 생각 안 한다. 애꿎은 시민들만 당할 때가 많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후 현장에서 전국철거민연합에 83세 할머니가 현수막을 걸려다 제지하는 경찰에게 맞아 눈 주변이 시퍼렇게 멍든 적이 있다. 그런데 경찰은 미안하다는 말 일언반구가 없었다. 용산 유가족이나 제주 강정마을의 집뺐긴 사람들, 세월호 때문에 자식 잃은 사람들한테 경찰은 ‘법대로 해’ 한마디만 한다. ‘이놈들 어떻게든 혼내줘야겠다’ ‘속을 드글드글 긁기 위한 기술들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에게 ‘야 이놈아’하는 것과 ‘야 이놈들아’하는 것이 다르다. 개인에게 욕을 하면 모욕죄가 되지만 전체 집단에 욕을 하면 처벌 조항이 없다. 냉정하지 않으면 현장에서 화를 내거나 욕을 해서 실수를 한다. 이런 걸 다 고려해서 계획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채증이나 녹음도 끈질기게 한다. 죄도 없는데 나를 체포한 경비과장을 인권위에 제소해서 경고조치를 받아낸 적이 있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아낸 경우도 있다.”

- 그래서 일각에서는 박성수씨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힘은 없는데 마음대로 힘 휘두르는 사람들을 잡기는 해야 하고. 힘으로 싸운다면 저쪽에서 힘을 더 과시하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근데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면서 ‘이상한 놈’이 되면 못 건드리더라. 법과 힘으로 안 먹히니 나름의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 앞으로의 계획은?

“‘일벌백계’다. 수성경찰서에는 계속 문서보내고 해명 요청하는 문서도 보내고, 공개적으로는 거짓말 탐지기를 가져가 한 경찰 간부의 거짓말을 확인하려고 한다. 체포될 당시 한 경찰 간부가 내 가슴 부분을 손가락으로 매우 세게 쿡쿡 찌르며 ‘야, 너 조심해 인마’ 라고 한 적이 있다. 검찰도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조서에 쓰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심했지만 박근혜 정부 들어 경찰과 검찰이 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검찰이 항소할 것이 확실해 보여 대구를 오가며 조사를 받을 것 같다. 피해자와 합의를 위해 서울도 종종 들릴 것 같다. 대통령이 피해자니, 대통령에게 얼마를 주면 합의할 건지, 국민의 비판 권리를 줄 건지 직접 물어보려 하고 있다.”

- 하고 싶은 말은?

“국민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나 독재에 대한 저항 의지, 이런 건 짓밟는다 해서 짓밟히는 게 아니다. 30년 전에도 짓밟히지 않았는데 21세기 정보통신 최첨단 사회에서 짓밟힐까. 지금 정부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자신들이 파놓은 함정이 오히려 무덤이 되지 않을까. 나 같은 사람들이 계속 밀어 넣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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