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 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2013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세계인이 주목하는 공식 선상에서 과연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을까. 놀랍게도 이 발언은 20년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취임사 중 일부다. 이 취임사를 작성했던 1993년 2월부터 10개월 간 문민정부의 통일부 장관을 겸했던 한완상(77) 전 부총리의 비망록인 ‘한반도는 아프다’(한울아카데미)는 20년 전보다도 퇴보한 한반도 정세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당시와 지금의 상황을 비교해 봤을 때도 한 전 총리가 지적했던 당시 남북관계보다 현재의 국면이 오히려 더 보수적이고 적대적이라는 사실은 아픈 현실이다. 그때 남북 간 현안이었던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씨의 북송 문제와 관련해 미디어리서치가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79%가 리씨의 송환에 찬성했으며,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국민의 약 80%가 북한을 더는 경쟁자나 적대적 존재로 보지 않고 북한과 협력을 증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반공적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한 전 총리의 ‘진보적 대북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한 전 총리는 한반도 핵문제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북·미간 일괄 타결이 해결의 열쇠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시 국방장관을 비롯해 비서실장, 외교안보수석 등 정부 핵심 관료들은 대통령의 눈치를 보거나 침묵했다. 한 전 총리는 이에 대해 “YS는 DJ(김대중 전 대통령)에 관해 언급하는 것 자체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는데, 내 발언은 런던에서 체류 중인 DJ가 북·미 포괄적 타결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발언과 비슷하다 여겼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이후 한 전 총리는 같은 해 12월 개각에서 시쳇말로 ‘찍어내기’를 당한다. 그의 대북관이 지나치게 친북적이라고 못마땅해하던 YS의 측근들은 후임자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북한 출신의 완강한 반공주의자인 이영덕 박사를 발탁했다. 조직적으로 그를 헐뜯어 끌어내리기 위한 작업들이 지속됐을 것이며 통일부총리 교체는 대통령 가까이 있는 반공주의자들의 작품이었던 셈이다.

   
한반도는 아프다 / 한완상 지음 / 한울아카데미 펴냄
 
‘적대적 공생관계의 비극’. 지난 60년간 분단과 냉전 속에 고착되면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어렵게 한 심각한 이념적 모순이자 아픔이다. 극단적으로 호전적인 권력주체는 체제 안보의 이름으로 다른 체제와의 긴장과 대결을 부추기고 합리화한다. 남한의 강경 냉전권력은 북한의 교조적 지배세력을 공식적으로 규탄하고 ‘악마화’ 하면서 역설적으로 지배세력의 지배력을 강화한다. 결국 남북관계가 악화될수록 이익을 보는 세력은 남북의 극단적 반민주 세력이다.

한 전 총리가 20년 전에 느꼈던 이런 통찰이 현재에도 유효한 이유는 극우세력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더욱 은밀하고 조직적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대북 사이버 방어심리전을 벌였다는 국정원과 국방부의 실제 ‘주적’은 북한과 종북세력이 아니라 정부·여당을 비판하는 야권과 평화와 민주주의를 갈구한 남한의 평범한 국민이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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