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에서 사과 재배를 하는 조원희씨(46)는 지난 1년간 정부나 정치권이 농민들을 생각해줄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개방 농정의 틀에 농민들이 나름의 저항도 해 보고 대안도 내놓았지만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정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난 대선에서도 농업을 국민 먹을거리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했지만 일부 후보 정책담당자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조씨는 ‘무관심’이 가장 힘들다고 말했다. 여기엔 언론의 무관심도 컸다. 지난 총선과 대선 때도 농업은 뒷전이었으며, 한-중 FTA 등 농민들 동의 없이 정부가 정책을 일방적으로 진행하는데도 언론은 주목하지 않았다. 조씨는 “농민은 소리 없이 죽어 가는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며 “농업 문제는 이제 농민들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농민들은 극심한 패배감에 빠져 있다”고 토로했다.

경남 김해에서 1800평 규모의 시설 토마토를 재배하는 주현철(53)씨는 농업 정책 수립에 있어 농심(農心)을 반영하는 절차가 전혀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지난 2008년부터 정부 주도의 농업 선진화 위원회에서 논의돼 대기업이 농업 생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가 마련된 것에 대해서도 정작 농가들은 불과 대선 전에서야 알았다고 밝혔다.

주씨는 “대기업이 농업 생산에 참여해 농가의 생존권을 옥죄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대기업이 토마토를 생산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며 “그것도 지역 방송에서 최초로 보도가 나가고 나서야 공론화가 됐지, 그전까지는 언론도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 지난달 4일 대기업 농업 생산 진출 저지를 위해 강원 춘천시청 앞 광장에 모인 농민들
©연합뉴스
 
대선 공약에서도 천대 받은 농업에 농민은 울었다

지난 1년간 농민들이 느꼈던 솔직한 심정은 한 마디로 실망과 좌절이었다. 농촌과 농민의 요구를 반영해야 할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이거니와 농심을 대변해야 할 언론조차도 농업을 껄끄러운 문제로만 여겼다. 언론은 농업을 경제민주화나 복지 담론 속에 낄 수 있는 틈조차 주지 않았다.

지난해 한국 사회는 5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대선이라는 큰 선거를 치렀으나 농업 문제는 관심 밖이었다. 특히나 전국의 농심을 헤아려야 할 대통령 후보자는 이때라도 농민의 고난과 아픔을 살피고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책무가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완주했던 문재인 후보도 농업 공약은 뒷전이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지난해 10월까지도 농업과 관련한 공약은 없었다. 당시 안철수 후보를 포함해 국민의 주목을 받던 세 후보자 모두에게 농업은 천대를 받았다.

   
▲ 경향신문 2012년 11월 2일자 2면.
 
경향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무소속 안철수 후보 홈페이지에 실린 대선 공약을 살펴본 결과 농업 관련 내용은 없었다”며 “농업에 관한 대선 후보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그들의 농촌 현장 방문 발언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대선 후보들도 농업 문제에 관심이 없었지만 공정 보도와 다양한 사회적 의제를 이끌어 나가야 할 언론도 틀에 박힌 대선 이슈를 따라가는 데 급급했다. 자연스레 농업 이슈도 ‘경제민주화’, ‘일자리 창출’ 등 거대 담론에 묻혀 제대로 조명조차 받지 못했다.

그나마 뒤늦게 발표된 후보들의 농업 공약을 검증하는 기사라도 내보냈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중앙일보·한국일보 등을 제외하고는 중앙 일간지들은 각 후보자의 농업 공약조차 다루지 않았다. 이들 언론에서 다뤘던 주제도 후보 간 견해 차이가 갈리는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농민의 요구가 큰 쌀 직불금 관련 내용이 주를 이뤘으며 모두 일회성 보도에 그치는 수준을 보였다. 수많은 복지 공약 관련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어도 ‘농민 복지’와 관련된 보도나 기획기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보수언론은 농업 이슈를 야당 후보의 약점을 강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지난해 12월 12일 <박근혜 vs 문재인 경제공약 심층점검> 기사에서 한미 FTA 재협상 여부에 대한 당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견해 차이를 소개하며 재협상을 주장하는 문 후보에 대해 “실현 가능성을 담보할 수 없다”며 몰아붙였다. 앞서 중앙일보도 11월 12일 <세 후보 공약 뜯어보니 … 곳곳에 못 지킬 정책 재탕 삼탕> 제하 기사에서 문재인·안철수 야당 후보의 직불제 강화 또는 확대 공약에 대해 “대표적인 삼탕째 공약”이라며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도 직불금을 늘리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의 절반도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대기업 농업진출 옹호하는 언론…농민이 농촌 파탄 주범?

최근까지도 정부 정책의 가장 큰 쟁점인 ‘경제 민주화’ 화두에서도 유통 대기업의 골목 상권 진출과 ‘밀어내기’ 등 불공정 거래를 비판하는 언론 보도는 많았지만, 농업 대기업이 농민의 생산 부분까지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 주요 언론은 오히려 옹호하기까지 했다.

이에 보다 못한 농민들이 직접 나서 대기업의 농업 진출에 반대하며 불매운동까지 벌였지만 보수 언론과 경제지들은 ‘농업 경쟁력’과 ‘영농 세계화’ 등의 논리로 농민들을 더욱 옥좼다.

   
▲ 중앙일보 3월 27일자 경제섹션 1면.
 
중앙일보는 동부그룹 계열사인 동부팜한농이 지난해 말 완공한 유리온실을 활용한 토마토 사업이 농민들의 반발로 일부 중단되자 3월 27일 <농업판 골목상권 침해 압박에 아시아 최대 유리온실 문 닫다> 제하 기사에서 “이명박 정부의 핵심 농업 정책인 ‘수출 농업’도 좌초의 위기를 맞았다”며 “동부 측은 농민단체가 참여하는 공동 생산 등의 방안을 내놓았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매일경제는 3월 28일자 사설에서 “동부 유리온실단지는 대규모 기업농을 육성해 농업을 수출산업화 하자는 2010년 매경 국민보고대회 ‘아그리젠토 코리아’의 일환이었다”며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의 입장을 옹호했다. 매경은 “청와대 앞에서 소피를 뿌리거나 고속도로를 점거하는 등 농민단체의 과격 투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며 “이제는 ‘골목상권’ 논리에 편승해 특정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집단 생떼로 사업까지 포기시킨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난의 대상이 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반박 논평에서 “상당수의 언론이 동부그룹의 화옹지구 사업 포기 발표를 대단히 안타까운 일로 묘사하며 감싸 나서고 있다”며 “매경은 농민들을 ‘반대나 일삼는 타성에 젖은 무리’로 묘사하며 그런 탓에 오늘날 한국 농업이 사양산업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고 훈수를 두고 있다”고 비판했다.  

전농은 또 “한국농어촌공사는 매경 사설에서 인용한 박재순 농어촌공사 사장의 ‘반대만 하는 농민’ 발언이 왜곡 날조돼 있음을 밝히는 해명자료를 발표했다”고 밝혔다. 이대종 전농 정책위원장은 14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언론은 언제부턴가 농업 재벌을 피해자로 만들었다”며 “무지몽매한 농민이 농업 선진화를 가로막고 수출농업을 가로막는 존재로 보도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들 언론은 농림부과 동부그룹의 비리와 이해관계라든지 FTA 피해보전 기금의 대기업 지원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따지지도 않았다”며 “이는 진보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농업은 우리 모두의 문제” 한목소리
“언론이 농업을 사회적 갈등으로만 다루지 말아야”

농업과 언론, 농민과 국민의 거리감을 줄일 방법은 없을까. 농민들과 농민단체, 농업 문제 전문가들은 농업이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모두의 안전과 건강에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돼야 한다고 한결같이 주장했다.

정기환 국민농업포럼 상임이사는 농업 이슈가 상대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있는 상황에 대해 농민과 언론의 ‘거리감’을 지적했다. 정 이사는 “농민과 언론인들과의 관계가 밀접하지 않고, 농촌 현장과 중앙 주요 매체들과도 접근성도 크게 떨어진다”며 “국가나 주류 사회에서 농업 문제가 의제화되지 않으니까 당연히 언론에서도 접근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국가발전 전략 차원에서 진행되는 개방 정책이나 자유무역협정(FTA)에 농업은 필연적으로 피해를 받는데 농민이 스스로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수단이 집회나 시위밖에 없다”며 “이에 대한 하소연이 진정한 요구나 목소리로 접수되는 게 아니라 사회갈등 관리 차원에서 접근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 이사는 “언론에서도 농업 문제를 사회적 갈등으로만 다루지 말고, 왜 농업이 소중하고 농촌을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지 현안과 대안을 엮어서 같이 보도해 줬으면 한다”며 “농업·농촌이 비단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로 공감대를 가질 수 있도록 국민 건강과 안전한 식량 자급, 세계적 에너지·환경·기후변화 등 복합적 위기 속에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로서 부각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대종 전농 정책위원장은 정부와 언론이 보다 적극 ‘식량 주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위원장은 “국민이 식량 주권을 식량 안보나 식량 자급률과 같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본래 식량 주권이 제기된 배경과 의미는 농업과 관련된 생산과 소비에 있어 농민과 소비자가 누려야 할 자주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함이다”며 “이는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소비자들도 안전한 먹을거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모든 권리로서 전체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라고 역설했다.

사과 재배 농민 조원희씨도 “언론이 농업의 가치에 주목하며 농업의 비교역적 기능이나 공익적 기능에서 더 나아가 국민이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게끔 먹을거리 복지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며 “학교 급식이 친환경 급식으로 자리 잡고 있듯이 병원이나 공공기관을 비롯해 군인과 저소득 계층 등에 대한 공공급식 조달 체계를 만드는 데 언론이 이슈화를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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